동서 분당 (Korean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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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이버 지식백과] 붕당 [朋黨]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성종때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이에 대한 처벌 규정이 들어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붕당 [朋黨]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네이버 지식백과] 무오사화 [戊午士禍]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은 중앙집권과 부국강병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에 따라 훈구 대신들이 권세가 높아지고 재산을 모으면서 부정부패와 폐단이 일어 성종 때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 정계로 진출하였다. 사림파는 3사(三司:司諫院 ·司憲府 ·弘文館)의 언론직(言論職) 및 사관직(史官職)을 차지하면서 훈구 대신의 비행을 폭로·규탄하고.(이하생략)
  • [네이버 지식백과] 사화 [士禍]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훈구파와 사림파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대립과 반목이 점점 심각해졌는데, 1498년(연산군 4) 두 파는 정면충돌을 하였으며, 그 결과 권력을 쥐고 있던 훈구파의 일격에 사림파는 패배하였다.
  • [네이버 지식백과] 조광조 [趙光祖]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정치(勳舊政治) 개혁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중략)..훈구정치를 극복하려는 정책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추진되었다.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 후에 폐위된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의 자의적인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도교 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한 것도 사상적인 문제인 동시에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윤원형 [尹元衡]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모든 관직은 매관매직되어 윤원형에게 뇌물을 바쳐야만 가능했고 뇌물을 받아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가 축재한 뇌물을 쌓아 둘곳이 없어 집 앞에서 시장을 열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정난정(鄭蘭貞)이라는 첩을 얻어 조강지처(糟糠之妻) 김씨가 독살되게 하였고 또 다른 첩의 소생인 아들 두리손을 죽여 시체를 강물에 버리는 패륜을 저질렀다.
  • [네이버 지식백과] 붕당 [朋黨]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네이버 지식백과] 정랑 [正郞]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조선에서는 1392년(태조 1) 관제를 제정하면서 6조와 고공사 및 도관의 정랑으로 두었고, 정원은 이조와 고공사는 각 1명, 나머지는 각 2명씩 두었다. 1405년(태종 5)에는 이조·호조·예조·공조에 각 3명, 병조·형조는 각 4명씩 두어 《경국대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가 《속대전》과 《대전통편》에서 인원에 변동이 있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전랑 [銓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네이버 지식백과] 전랑 [銓郞]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네이버 지식백과] 오건 [吳健]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1571년(선조 4)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고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독서와 집필로 여생을 보냈다. 하지만 그가 사직한 이조정랑 후임자를 두고 김효원과 심의겸이 대립하여 동서 분당의 계기가 되었고 이후 조선 정치사를 뒤흔든 300년 당쟁이 시작되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김효원 [金孝元]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1574년(선조 7년) 이조정랑으로 있던 오건(吳健)이 자리를 옮기면서 김효원을 이조정랑으로 추천하여 천거되자 척신 윤원형의 문객(門客)이라는 이유로 심의겸(沈義謙)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결국 김효원은 이조정랑에 등용되었지만 이일을 가슴에 담아두고 심의겸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형제인 척신이라는 이유로 이를 강하게 배척하였으며 심의겸과 심충겸에게 인신공격을 하였다.
  • [네이버 지식백과] 인목대비 [仁穆大妃]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정인홍을 중심으로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주창되었고 이이첨, 허균 등이 적극 주장하였다. 1612년(광해군4) 이들의 사주를 받은 윤인(尹訒)에 의해 살해될 뻔했으나 박승종(朴承宗)의 저지로 목숨을 보전하였다. 1613년 대북파의 모략으로 어린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며, 친정 아버지 김제남 등이 사사(賜死)되고, 1618년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경신환국 [庚申換局]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하며, 이 사건으로 서인(西人)이 득세하였다. 1674년(현종 15) 예송(禮訟)에서의 승리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현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숙종으로부터는 신임을 얻지 못했다. 이것은 남인끼리 청남(淸南) ·탁남(濁南)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한편으로는 권력을 장악한 남인 세력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갑술환국 [甲戌換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1694년(숙종 20)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이 물러나고, 소론과 노론이 다시 장악한 정국(政局)...(중략)...왕비 장씨마저도 희빈(嬉嬪)으로 강등되었다. 이 사건으로 세력을 잃은 남인계는 그 뒤 이를 만회하지 못하였다.
  • [네이버 지식백과] 갑술환국 [甲戌換局]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남인은 1689년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힘겹게 집권했는데, 기사환국은 남인이 스스로 정치력을 발휘하여 집권한 것이 아니라 서인에 대한 숙종의 염증과 혐오 때문에 얻은 것이었다...(중략)...장씨를 총애하여 희빈(禧嬪:희빈장씨)을 삼았으며 아들을 낳자 나중에는 왕비로까지 책봉하였으나, 장씨가 차차 방자한 행동을 취했으므로 그를 싫어하고 민씨를 폐한 일을 후회하게 되었다. 게다가 장씨보다는 무수리 출신의 후궁 최씨(최씨는 후일 영조의 생모가 된다.)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중략)....이 옥사의 타격으로 남인은 완전히 정권에서 밀려나 다시 대두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그 대신 서인이 실권을 잡게 되었으며, 그 후부터는 노·소론(老少論) 간에 쟁론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 사건을 갑술옥사(甲戌獄事) 또는 갑술경화(甲戌更化)라고도 하며 이후 남인의 정치력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이후 집권하지 못했다.
  • [네이버 지식백과] 병신처분 [丙申處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병신처분은 1716년(숙종 42)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 사이에서 발생한 회니시비(懷尼是非)에 대해 국왕이 판정한 처분을 말한다...(중략)...노론은 숙종의 인정과 지원을 받아 정국 주도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신임사화 [辛壬士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네이버 지식백과] 벽파 [僻派]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남인, 즉 시파는 장헌세자가 억울하게 폐위되고, 또 뒤주 속에 갇혀 참혹하게 굶어 죽었다고 생각하여 세자를 동정하였다. 그러나 노론, 즉 벽파는 세자가 광패(狂悖)하여 폐세자(廢世子)의 변을 자초하였으니 조금도 동정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세자가 만일 왕위에 오른다면 나라를 망칠 것이므로 적극적으로 배척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