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 儒理尼師今立 南解太子也 母雲帝夫人 妃日知葛文王之女也或云妃姓朴許婁王之女” (유리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남해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운제부인이고 왕비는 일지(日知) 갈문왕(葛文王)의 딸이다. 혹은 왕비의 성은 박씨이고 허루왕의 딸이라고도 하였다.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金大問則云 尼師今方言也 謂齒理 昔南解將死 謂男儒理·壻脫解曰 吾死後 汝朴昔二姓 以年長而嗣位焉 ”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가 장차 죽을 즈음에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고 하였다.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儒理齒理多 乃與左右奉立之 號尼師今” (유리의 잇금〔齒理〕이 많았으므로 이에 좌우의 신하와 더불어 그를 받들어 세우고 이사금이라 불렀다.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大赦” (즉위 2년(25년) 봄 2월에 친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五年 冬十一月 王巡行國內 見一老嫗 飢凍將死曰 予以眇身居上 不能養民 使老幼至於此 極 是予之罪也 解衣以覆之 推食以食之 仍命有司 在處存問 鰥寡孤獨 老病不能自活者 給養之” ( 즉위 5년(28년) 겨울 11월에 왕이 나라 안을 순행(巡行)하다가 한 할멈이 굶주리고 얼어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내가 미미한 몸으로 왕위에 있으면서 백성을 능히 기르지 못하여 늙은이와 어린 아이로 하여금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 [왕이] 옷을 벗어서 덮어주고 밥을 주어 먹게 하였다. 그리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곳곳에 있는 홀아비와 홀어미, 부모없는 아이, 자식 없는 늙은이와 늙고 병들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위문하고 양식을 나누어 주어서 부양하게 하였다.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 攻陷朶山城” (즉위 13년(36년) 가을 8월에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즉위 14년(37년)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으므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 (즉위 17년(40년) 가을 9월에 화려현(華麗縣)과 불내현(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十九年 秋八月 貊帥獵得禽獸獻之” (즉위 19년(42년) 가을 8월에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하여 얻은 새와 짐승을 바쳤다.)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三十四年 秋九月 王不豫 謂臣寮曰 脫解身聯國戚 位處輔臣 屢著功名 朕之二子 其才不及遠矣 吾死之後 卽大位 以無忘我遺訓 冬十月 王薨 葬蛇陵園內” (즉위 34년(57년) 가을 9월에 왕이 병환이 들자 신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탈해는 그 신분이 임금의 친척이고 지위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며 여러 번 공명(功名)을 드러내었다. 짐(朕)의 두 아들은 재주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내가 죽은 후에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할 것이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 겨울 10월에 왕이 죽어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