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sis of information sources in references of the Wikipedia article "견당사" in Korean language version.
일본은 이미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때에 수(隋)에 견수사(遣隋使)를 보내고, 유학승(留學僧)을 파견하여 중국의 문물제도를 섭취하는 데 힘썼다.
이러한 사자의 파견은 618년 수가 망하고 신흥의 당제국(唐帝國)이 성립된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이 견당사의 파견은 다이카(大化) 개신 뒤에는 국제관계의 긴장으로 인해 주로 정치·경제상의 목적으로만 행하여졌다.
그러나 그 후 7세기 말엽까지의 약 30년간 율령제(律令制) 국가건설의 중요시기에는 견당사의 파견이 중단되었었으나, 702년에 다시 문화목적을 주로 한 견당사의 파견이 재개되어,
항로는 처음 한국의 서해안을 따라서 북상하여 산둥반도(山東半島)에 이르렀으나,
7세기 후반부터는 동(東)중국해를 횡단하여 양쯔 강으로 이르는 남로(南路)가 개척되었고, 9세기에는 양쯔 강으로 직행하였다.
당시의 당은 인도, 페르시아, 아라비아를 포함하는 세계적 문화권의 중심이었는데, 일본은 이 성당문화(盛唐文化)를 섭취함으로써 비로소 덴표(天平)시대의 대륙적 문화가 개화할 수 있었다. 이 견당사에 의해 수입된 서적과 기술자가 습득한 여러 기술은 이후 일본문화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