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구검 (Korean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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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정사조선전 주석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국사편찬위원회. 이는 魏가 公孫氏를 멸망시킨 다음 幽州刺史 毌丘儉을 보내어 고구려를 칠 때(244~245) 그 예하의 玄菟太守 王頎가 夫餘에 온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나 王頎가 夫餘에 들른 것은 高句麗 원정의 길에 올랐을 때가 아니라 그것이 완료된 후 回軍할 때의 일로 보는 설도 있다. 즉, 高句麗의 東川王을 北沃沮에까지 추격한 王頎는 間島 지방에서 瑚爾喀河(牧丹江) 유역으로 진군하여, 그 서북으로 연결되어 있는 小白山系의 산맥을 넘어 夫餘가 자리잡고 있는 阿勒楚喀 평야를 거쳐 오늘날 撫順市가 있는 玄菟郡治로 개선, 歸陣하였다는 것이다. (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그러나 王頎가 동북 滿洲의 密林 지대를 크게 迂廻, 夫餘를 거쳐 歸陣하였다는 데는 反論도 있어(和田淸,「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參考文獻≫李基白·李基東 共著,『韓國史講座』(古代篇), 1982.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2, 1930.和田淸,「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東洋學報』32卷 3號, 1950.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news.naver.com

  • 일본학자 다나카 도시아키(田中俊明)는 2008년 중국에서 발견된 무구씨조상비(毋丘氏造像碑)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국의 고고학』 2008년 가을호에서 관구검이 아니라 무구검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구려 공략 유주자사는 '무구검'. 연합뉴스. 2008년 10월 5일. 2015년 6월 23일에 확인함. 

web.archive.org

  • “중국정사조선전 주석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국사편찬위원회. 이는 魏가 公孫氏를 멸망시킨 다음 幽州刺史 毌丘儉을 보내어 고구려를 칠 때(244~245) 그 예하의 玄菟太守 王頎가 夫餘에 온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나 王頎가 夫餘에 들른 것은 高句麗 원정의 길에 올랐을 때가 아니라 그것이 완료된 후 回軍할 때의 일로 보는 설도 있다. 즉, 高句麗의 東川王을 北沃沮에까지 추격한 王頎는 間島 지방에서 瑚爾喀河(牧丹江) 유역으로 진군하여, 그 서북으로 연결되어 있는 小白山系의 산맥을 넘어 夫餘가 자리잡고 있는 阿勒楚喀 평야를 거쳐 오늘날 撫順市가 있는 玄菟郡治로 개선, 歸陣하였다는 것이다. (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그러나 王頎가 동북 滿洲의 密林 지대를 크게 迂廻, 夫餘를 거쳐 歸陣하였다는 데는 反論도 있어(和田淸,「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參考文獻≫李基白·李基東 共著,『韓國史講座』(古代篇), 1982.池內宏, 「曹魏の東方經略」『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2, 1930.和田淸,「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東洋學報』32卷 3號, 1950.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wikisource.org

ko.wikisource.org

  • 진수(3세기),《삼국지》〈권30〉 부여 조(夫餘 條) “正始中,幽州刺史毌丘儉討句麗,遣玄菟太守王頎詣夫餘,位居遣大加郊迎,供軍糧。”(정시 년간(240년에서 249년 4월까지)에 유주자사인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면서 현도 태수 왕기를 부여에 보냈고, 위거는 견사를 보내어 교외에서 (왕기를) 맞게 하고, 군량을 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