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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832년(흥덕왕 7) 왕사 심지(心地)가 중창하였는데, 그 때가 겨울철임에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꽃이 만발하였으므로 동화사로 고쳐불렀다고 한다.
미륵보살의 수계를 의미하는 징표를 가리키는 불교용어. ~~ 이 두 간자는 진표에서 영심(永深)에로 전해졌고, 영심은 다시 심지(心地)에게 전하여 신라 법상종의 사자상승(師子相承)의 징표로 삼기도 하였다.
“1592년 팔공산 동화사에서 수행하시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화사에 영남 승군의 사령부인 영남치영아문을 설치하고 영남도총섭으로 전국의 승병을 총괄하시며 전국 각지의 전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셨습니다.” 출처 : BBS NEWS(https://news.bbsi.co.kr)
‘대구 동화사 봉황문’은 조선후기 천633년, 선조 11년에 최초로 건립됐습니다. 원래는 옹호문 자리에 위치했지만 1965년 현 위치로 이건했습니다.
국보 1호 서울 숭례문’이 이제부턴 1호가 빠진 ‘국보 서울 숭례문’으로 표기된다. 문화재청은 개정된 ‘문화재보호법 시행령’과 ‘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 등을 19일 공포, 이날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
낙안군 동화사 승당의 불상 개금과 탱화를~(樂安郡桐華寺僧堂佛像改金~) 『불조록찬송』 서문(佛祖錄贊頌 ... 兩笻一擲庭生樹 두 지팡이 던져 두니 뜰에 나무로 자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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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서루는 '봉황이 깃든 누각' 이란 뜻으로 동화사를 대표하는 누각이다. 현재는 주로 제사나 재를 지내는 장소로 사용된다. 대웅전을 향해서는 유리로 문을 하여 큰 법회시 봉서루에서도 대웅전을 향해 법회에 동참할 수 있다. 동편에는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그 좌우에 영구위패롤 모셨다. 봉서루는 네모난 돌기둥을 세워 누문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5칸의 목조 누각을 세운 독특한 건축양식이다.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 널찍한 자연석이 하나 놓여 있다. 이곳이 봉황의 꼬리 부분이며, 누각 오른쪽 귀퉁이에 있는 둥근 돌은 봉황의 알을 상징한다.
봉서루 뒤편에는 대웅전을 향해 '영남치영아문'의 현판이 걸려 있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으로 동화사에서 승병을 지휘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현판이다.
심지 대사가 받은 뒤 팔공산에 와서 이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지으니, 이곳이 바로 동화사 첨당 북쪽 우물이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 우물터가 바로 금당선원 자리이다.
석우, 효봉 대종사를 비롯, 성철스님 등 해방 이후 불교 정화의 주체가 된 많은 스님들이 이곳에서 결사를 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곳이다. 1974년 5월 증개축 불사로 선원의 면모를 새롭게 정비하였으며, 현재 납자들이 정진 중에 있다. 금당선원은 사찰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보물 제248호 삼층석탑 2기가 극락전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팔공총림 동화사 율학승가대학원은 2013년에 설립되어 2015년 2월에 1기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러한 명맥을 1992년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에 조성된 33m 높이의 약사여래입상이 이어가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부지면적 3만 3,050㎡에 1990년 10월 26일부터 불사를 착공하여 대불 점안 대법회를 1992년 11월 27일에 가졌으니 25개월의 기간이 소요된 대대적인 공사였다. ~~ .동화사 통일약사대불 점안식을 거행한 1992년 11월 27일 당시는 때마침 대통령 선거기간이어서 쟁쟁한 대통령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0만 명이 넘는 불교 신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성황을 이룬 자리에 민자당 김영삼 후보, 민주당 김대중 후보, 국민당 정주영 후보가 한 자리에 참석
석조대불의 높이는 17m에 좌대 높이가 13m, 지하암반에서 참배단까지가 3m여서 총 33m 높이다. 대불의 최대 둘레 또한 16.5m여서 거대한 크기를 더욱 실감할 수 있다. 대불의 부속시설 또한 국내 최대로 꼽히는데 두 삼층석탑의 높이가 각각 17m이며 원석 2,000t에 달한다. 또한 두 석등 역시 7.6m의 높이에 200t의 원석으로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좌대 난간, 참배단, 배면 병풍석에 원석 5,000t이 쓰였다.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은 우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하루빨리 성취하여 분단의 아픔을 해소하고 민족 대화합을 이루어 내는 데 그 조성 이유가 있다. 통일에 걸림돌이 되는 갈등을 치유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속히 이루고자 하는 뜻을 담고 있다.
금당암은 동화사의 별원으로 봉서루(鳳棲樓) 앞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개울 건너편에 있다. 금당암에는 승려들이 참선 수행하는 금당선원이 있어서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한다.
『동화사사적기(桐華寺寺蹟記)』에는 지금의 ‘비로암’을 ‘비로전(毘盧殿)’으로 적혀 있다. 1591년(선조 25)에 서일화주(瑞一化主)가 다시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비로암에 남아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삼층석탑의 성보 유물,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호(舍利壺)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통일신라 경문왕 3년(863)에 민애왕의 명복을 빌고자 이 탑을 세웠다.”
대구 동화사 극락전은 1600년(선조 33년)에 중건이 시작됐다. 그중 금당(金堂)을 제일 먼저 건립했는데, 지금의 극락전으로 판단된다.
대구 동화사 수마제전은 극락전의 뒤쪽에 있으면서 고금당(古金堂)이라고 전한다. 1465년(세종 11년)에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뒤 1702년(숙종 28년)에 중창되었다는 기록이 전하며,
정 회장님은 그때 큰 시주를 하셨습니다. 정 회장님의 부인 변중석(보현행) 보살님도 동화사 주차장 부지 1만5천평을 매입해 시주하셨습니다.
멀리 절에 올라가는 좁은 돌층계 길, 푸른 등나무에 흰 버선에 또한 검은 지팡이. 저토록 흥겨운데 아는 이 없으니, 청산에 흥겨움이 있지 스님에게 있지 않거늘. ------------서거정의 동사심승(桐寺尋僧
주민들은 "실제 금괴가 땅 아래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대웅전 뒤뜰은 아는 사람만 복을 빌고 가는 기운이 좋은 곳"이라고 입을 모은다.
'동화사 금괴 소동'은 6·25 때 인민군이 대구 사찰 뒤뜰에 금괴 40㎏을 묻었다는 이야기다.
오는 4일부터 대한불교조계종 산하 사찰에 입장할 때 징수하던 문화재 관람료가 면제된다.
대구부사 윤현은 대구읍성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결국 윤현은 동화사를 대구 관군의 본부로 삼았고, 대구부의 관리들은 동화사 소속 암자인 염불암으로 들어갔다.
동화사의 칠성각 안에는 1857년(철종 8년)에 그려진 삼존 형식의 칠성탱 화(七星撑畵)가 있다.
동화사의 옹호문(擁護門)은 불법(佛法)을 호위하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모셔둔 곳이다. 예전에 있었던 옹호문 자리에 새로 건립하여 금년 12월1일 에 낙성식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