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지식백과] 알주바로타와 발베르데 전투 (스페인·포르투갈사, 2005. 7. 15., 강석영, 최영수, 위키미디어 커먼즈)..... 1385년 8월 14일 알주바로타(Aljubarrota)에서 양국의 군대가 마주쳤다. 적군은 32,000명이었고, 포르투갈 군은 7000명에 불과했지만, 반 시간도 채 못 되어, 적은 참패를 당하고 도주했다.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왕은 이곳에 성모 마리아의 이름으로 장엄한 건축을 축조했는데, 이곳이 오늘날 바탈랴 수도원(mosteiro da Batalha)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박영준 <섬의 세계사> 가람기획 1999.3.23 p294 세인트 헬레나섬은 나폴레옹의 유배지로 유명하다.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동년 10월 영국 군함에 호송되어 이곳으로 왔으며 1821년 5월 5일 사망하기까지 섬의 동쪽 해안에서 유배생활을 보냈다. 주앙 다 노바에 의해 처음 발견된 후 적극적으로 활용되지는 못했으나 1659년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이곳을 개발하면서 희망봉을 돌아가는 유럽-아시아 항해에 주요한 기항지, 보급항의 역할을 했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그 가치를 상실했다. 섬의 이름은 콘스탄티니우스 황제의 친모인 세인트 헬레나의 이름에서 따왔다. 가장 가까운 육지는 아프리카 앙골라 해안으로 약 1,900km 떨어져 있다. 면적은 3만 7천평정도이다. 현재에는 영국의 식민지이며 1991년 기준 약 6,00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섬의 공식 홈페이지는 https://www.sainthelena.gov.sh/이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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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준 <섬의 세계사> 가람기획 1999.3.23 p294 세인트 헬레나섬은 나폴레옹의 유배지로 유명하다.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동년 10월 영국 군함에 호송되어 이곳으로 왔으며 1821년 5월 5일 사망하기까지 섬의 동쪽 해안에서 유배생활을 보냈다. 주앙 다 노바에 의해 처음 발견된 후 적극적으로 활용되지는 못했으나 1659년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이곳을 개발하면서 희망봉을 돌아가는 유럽-아시아 항해에 주요한 기항지, 보급항의 역할을 했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그 가치를 상실했다. 섬의 이름은 콘스탄티니우스 황제의 친모인 세인트 헬레나의 이름에서 따왔다. 가장 가까운 육지는 아프리카 앙골라 해안으로 약 1,900km 떨어져 있다. 면적은 3만 7천평정도이다. 현재에는 영국의 식민지이며 1991년 기준 약 6,00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섬의 공식 홈페이지는 https://www.sainthelena.gov.sh/이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