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라집 한역, 차차석 번역 (K.991, T.614). 《좌선삼매경》 하권:
만일 수행자가 법념지를 얻는다면 세간의 공(空)ㆍ늙음ㆍ병듦ㆍ죽음의 법을 싫어하여 도무지 조금도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 공한 법에서 다시 무엇을 구하는가?
마땅히 열반의 최선의 법 가운데 들어가서 머물러야 하며, 정진의 힘을 세워서 깊은 사마타(舍摩陀)를 얻는다.깊은 사마타라는 것은 마음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적절히 표현할 이름이 없다. 이때 깊은 사마타를 얻어서 제4의 법념지 가운데 머문다.
모든 존재[諸法]의 모습을 관하건대 모든 것이 괴로움이어서 즐거움이 없으며, 즐거움이 없는 것이 진실이요 나머지는 거짓말이니, 괴로움은 애착 등의 여러 가지 번뇌와 업에서 연유한다. 이것은 하늘이 아니며, 시간이 아니고 티끌 등이 아니다.{티끌이 아니라는 등의} 이와 같은 갖가지 거짓말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갖가지 거짓말 속에서 생기니,} 이 번뇌와 업이 이 괴로움을 발생시킨다. 이 괴로움은 열반에 들어갔을 때 일체가 남김없이 사라진다.
세우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K.949, T.1542). 《아비달마품류족론》 제1권.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염(念)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분명히 기억하는 성품[明記性]이다.
세친 조,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아비달마구사론》 제23권 그렇다면 4념주의 본질[體]은 무엇인가?
이러한 4념주의 본질에는 각기 세 가지가 있으니, 자성(自性)과 상잡(相雜)과 소연(所緣)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즉 자성염주(즉 염주 그 자체)는 혜를 본질로 하는데, 이러한 혜에도 역시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문(聞) 등에 의해 성취되는 혜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역시 3종 염주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잡염주는 이러한 혜와 그 밖의 구유하는 법을 본질로 하며, 소연염주는 이러한 세 가지 혜의 소연이 되는 제법을 본질로 한다.5) 5) 자성염주의 본질은 문 · 사 · 수소성의 세 가지 혜로서, 4념주는 각기 이러한 혜를 본질로 하여 성립하기 때문에 역시 세 가지 종류로 분류된다. 상잡염주란 혜와 상응 · 구유하는 심 · 심소법과 득(得)과 4상을 말하며, 소연염주란 혜에 의해 관찰되는 몸 · 수 · 마음 · 법 등을 말한다. 즉 염주는 그것을 소연으로 하여 성립하였기 때문이다.
자성염주의 본질은 바로 혜로서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안 것인가?
경에서 설하기를, “몸에 대해 순신관(循身觀, kāyānupāśin:몸을 쫓아 관하는 것)으로 머무는 것을 신념주라고 이름하며, 그 밖의 세 가지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다.6) 즉 ‘쫓아서 관하는 것[循觀, anupaśin]’이라고 이름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혜 자체에 근거한 것이니, 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몸을] 쫓아서 관하는 관법의 작용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6)『잡아함경』 권제24(대정장2, p.171상, p.상), “이른바 4념처가 있으니,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한 것인가? 몸을 몸이라고 관하는 염처이며, 지각을 지각으로, 마음을 마음으로, 법을 법으로 관하는 염처가 바로 그것이다.” 『중아함경』 권제24 「염처품」(대정장1, p.528) 참조.
어떠한 연유에서 혜에 대해 염주라고 이름한 것인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러한 품류는 기억[念]이 증대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기억의 힘이 혜를 유지시켜 일어날 수 있게 한다는 뜻으로, 마치 도끼가 쐐기의 힘에 의해 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다.”7) 7) 염주의 본질이 혜라면 왜 ‘혜주(慧住)’라고 이름하지 않고 ‘염주(念住)’라고 이름한 것인가 하면, ‘염’이 증대하여 그 힘에 의해 혜가 소연에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주 세친은 이와 반대로 염은 혜에 의해 관찰된 것만을 능히 명기(明記)하는 것으로, 혜의 힘이 ‘염’을 소연의 경계에 머물게 하기 때문에 ‘염주’라고 이름한 것이라고 하였다.(후술)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혜가 염으로 하여금 [소연에] 머물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혜에 대해 ‘염주’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이라고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니, 혜에 의해 관찰된 바에 따라 능히 명기(明記)하기 때문이다. 곧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무멸(無滅)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능히 몸에 대해 순신관(循身觀)으로 머물 때라면, 몸을 소연으로 하는 ‘염’이 머물 수 있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8) 세존께서도 역시 설하시기를, “만약 어떤 이가 몸에 대해 순신관으로 머물 때라면, ‘염’은 바로 틀림없이 머물게 된다”고 하셨던 것이다9) 8)『잡아함경』 권제19 제535경(대정장2, p.139중). 여기서 무멸은 존자 아나율(阿那律, Aniruddha). “무엇을 일러 4념처를 즐기는 것이라고 하는가? 존자 대목건련이시여! 만약 어떤 비구가 몸을 몸으로 관하는 염처[身身觀念處]에서 마음이 몸을 소연으로 삼아 정념(正念)으로 머물어 조복받고 지식(止息) 적정(寂靜)하여 한 마음이 증진(增進)하면, 이와 마찬가지로 수ㆍ심ㆍ법념처에서 정념으로 머물어 조복받고 지식 적정하여 한 마음이 증진하면 이를 4념처를 즐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본론의 뜻은 혜의 심소가 순신관에 의해 몸을 관찰할 때 동시에 염의 심소가 혜의 심소가 관찰한 바를 기억하여 그 소연(즉 몸)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9)『잡아함경』 권제11 제281경(대정장2, p.77하), “어떻게 4념처를 닦아 7각분의 원만함을 획득하는 것인가? 목건련 비구는 이와 같이 몸에 따라 신관(身觀)에 머무니, 그는 몸에 따라 신관에 머물 때 기억[念]을 모아 안주하여 결코 잊지 않았다.(云何修四念處得七覺分滿足? 目揵連比丘如是順身身觀住, 彼順身身觀住時 攝念安住不忘.)”
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K.955, T.1558). 《아비달마구사론》 제22권:
‘수(數, ganaṇā)’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마음을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여 어떠한 가행도 짓지 않고, 몸과 마음을 편안히 놓아둔 채 오로지 들숨과 날숨만을 생각하고 기억하여 하나에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게 헤아리는 것[數]을 말하니, 마음이 경계(즉 입식ㆍ출식)에 너무 매이거나 흩어지는 것을 염려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중생은 생각이 많고 어지러운 마음으로 뒤바뀌었기에 이 몸ㆍ느낌ㆍ마음ㆍ법에 집착되어 삿된 행을 짓나니, 이런 사람을 위하는 까닭에 4념처를 설한다.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그것은 왜냐하면 범부가 아직 도에 들지 않았을 때 이 네 가지 법에서 삿된 행을 하거나 네 가지 뒤바뀐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모든 부정한 법에 대하여 깨끗하다는 뒤바뀐 생각[淨顛倒]을 일으키며, 괴로움에 대하여 즐겁다는 뒤바뀐 생각[樂顛倒], 무상함에 대하여 항상하다는 뒤바뀐 생각[常顛倒], 나가 없는데 대하여 나라는 뒤바뀐 생각[我顛倒]을 일으킨다.
이런 네 가지 뒤바뀜[四顛倒]을 깨뜨리기 위한 까닭에 이 4념처를 말하는 것이다.
깨끗하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신념처(身念處)를 말하고, 즐겁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수념처(受念處)를 말하고, 항상하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심념처(心念處)를 말하고, 나가 있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법념처(法念處)를 말한다.
이런 까닭에 넷을 말하니, 이는 모자라지도 많지도 않은 것이다.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네 가지 법을 네 종류로 관찰하니, 곧 몸이 부정하다고 관찰하고, 느낌은 괴롭다고 관찰하고, 마음은 무상하다고 관찰하고, 법은 나가 없다고 관찰한다.
이 네 가지 법이 각각 네 가지 법을 갖추고 있으나, 몸에서는 부정을 많이 관하고, 느낌에서는 괴로움을 많이 관하고, 마음에서는 무상함을 많이 관하고, 법에서는 나 없음을 많이 관해야 한다.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수행자는 이 몸이 이렇게 부정하고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다고 사유한다. 이러한 한량없는 허물이 있으니, 이러한 갖가지 방법으로 몸을 관찰하는 것을 신념처라 한다.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세간의 즐거운 느낌을 괴롭다고 관찰하고, 괴로운 느낌은 화살과 같다고 관찰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여 무너지는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라고 관찰한다.
이와 같다면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는 욕심의 집착을 내지 않고,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는 성냄을 일으키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하여는 우치를 일으키지 않게 된다. 이것이 수념처(受念處)이다.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이와 같은 한량없는 이유{인연} 때문에 마음이 무상한 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심념처(心念處)이다.
如是無量因緣故,知心無常,是名心念處。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이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모든 법이 화합의 인연으로 생겨난 것이어서 나라고 이름 지을 만한 실제의 법이 없다고 관찰하니, 이것을 법념처(法念處)라 한다.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몸을 따라 관찰[循身觀]해보면, 이 몸은 나[我]가 없고, 나가 없음 즉 무아(無我)이기에 실(實)이 없고, 실이 없음 즉 공[空]하기에 남녀 등의 모든 특정할 수 있는 특징 또는 성질{모양}이 없고, 특정할 수 있는 특징 또는 성질이 없음 즉 무상(無相)이기에 이 몸은 부작원(不作願)이다, 즉, 짓고자 하는 (자신의 또는 타자의) 원에 의한 존재 즉 짓고자 하는 원이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不作願].
{몸을 따라 관찰[循身觀]해보면, 이 몸은 나[我]가 없고, 무아(無我)이기에 실이 없고, 공[空]하기에 남녀 등의 모든 특징 또는 성질{모양}이 없고, 무상(無相)이기에 이 몸은 짓고자 하는 원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不作願].}{몸을 두루 관찰하건대 이 몸은 나 없고, 나 없기에 공하고, 공하기에 남녀 등의 모든 특징 또는 성질{모양}이 없고, 특징 또는 성질{모양}이 없기에 원(願)을 짓지 않는다.}’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이와 같이 사유하여, 이 몸은 본래부터 생상(生相)이 없다는 것을 즉 나게 하는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다는 것을 즉 무생(無生)이라는 것을 알고, 이 몸은 무상(無相)이며 무가취(無可取: 잡을 수 없음)라는 것을 안다. 무생(無生)이므로 무상(無相)이며 무상이므로 무생이건만 다만 속임을 당한[誑] 범부인 까닭에 [실재하는] 몸이라 이름한다는 것을 안다. {이와 같이 사유한다면 이 몸은 본래부터 나는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음을 아나니, 이 몸은 무상(無相)이며 잡을 수 없다.
무생이기에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고,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기에 무생이거늘 오직 어리석은 범부인 까닭에 일컬어 몸이라 함을 안다.}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보살이 이와 같이 몸의 실상을 관찰할 때, 번뇌에 오염된 모든 욕망[染欲]과 집착을 떠나서 마음이 항상 생각[念]을 묶어 몸에 두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몸을 따라 살피는 것을 일컬어 보살의 신념처라고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몸의 실상을 관찰할 때, 번뇌에 오염된 모든 욕망[染欲]과 집착을 떠나서 항상 마음을 묶어 몸에 두고 이와 같이 몸을 따라 살피는 것을 일컬어 보살의 신념처라고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몸의 실상을 관찰할 때 모든 물들은 욕망[染欲]과 집착심을 여의고 항상 마음을 묶어 몸에 두고 몸을 두루 살피니, 이와 같음을 일컬어 보살의 신념처라고 한다.}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보살은 어떻게 심념처(心念處)를 관찰하는가?
보살은 먼저 안의 마음을 관찰하여 안 마음에 생(生)ㆍ주(住)ㆍ멸(滅)의 세 가지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있음을 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마음은 온 곳도 없고, 멸해도 가는 곳도 없으며, 오직 안팎의 인연이 화합해서 생긴 것이다. 이 마음은 고정된 실제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고, 실제의 생ㆍ주ㆍ멸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과거의 세상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미래의 세상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현재의 세상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이 마음은 안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밖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중간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이 마음은 성품이 없고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다. 또한 이 마음은 스스로 낳는 이도 없고 또한 낳도록 시키는 이도 없다. 밖으로는 갖가지 뒤섞인 6진(塵)의 인연이 있어서 그리고 안으로는 뒤바뀐 마음작용[心相]이 생멸하고 상속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으로 억지로 마음[心]이라 한다.’
이와 같이 마음 가운데서는 실로 마음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心相]을 얻을 수 없다.
이 마음의 성품은 생겨난다고도 말할 수 없고 소멸한다고도 말할 수 없는데 항상 깨끗한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지만 객진번뇌[客煩惱]16)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가 서로에게 들러붙었기 때문에 부정한 마음[不淨心]이 된 것이다.
마음은 자신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마음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공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근본에서나 지말에서나 실유하는 법이 아니다. 이 마음은 모든 법과 합한다고도 말할 수 없고 흩어진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시간에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무색이며, 무형이고, 무대이다. 다만 뒤바뀌고 거짓되어 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마음은 공하여 무아이고, 무아소이고, 무상이고, 무실이다.
이것을 일컬어 ‘마음을 수순하는 관법’[隨順心觀]이라 한다.
마음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무생임을 알면, 즉, 생겨난다고도 말할 수 없고 소멸된다고도 말할 수 없음을 알면 무생법(無生法)에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무생이고 즉 생겨난다고도 말할 수 없고 소멸된다고도 말할 수 없고, (고정된) 성품[性]이 없고,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지혜로운 이는 능히 안다. 지혜로운 이는 비록 이 마음의 생멸하는 특징 또는 성질{모습}을 관찰하면서도 실제의 생멸하는 법을 얻지 않으며, 더러움[垢]과 깨끗함[淨]을 분별치 않으므로 마음의 청정[心清淨]을 얻는다. 이와 같이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객진번뇌[客煩惱]에 물들지 않는다.
이와 같이 안의 마음을 관찰하고, 밖의 마음도 관찰한다.
안팎의 마음을 관찰함도 또한 이와 같다.
{곧 보살이 안의 마음을 관찰하건대, 이 안 마음에 세 가지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있으니, 생(生)ㆍ주(住)ㆍ멸(滅)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마음은 온 곳도 없고, 멸해도 가는 곳도 없으며, 오직 안팎의 인연이 화합해서 생긴 것이다. 이 마음은 일정한 실제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고, 실제의 생ㆍ주ㆍ멸도 없으며,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세상에 있지도 않다. 이 마음은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지 않으며, 중간에 있지도 않다. 이 마음은 성품 없고 특징 또는 성질{모습} 없으며, 또한 내는 이도 없고 나게 하는 이도 없다. 밖으로는 갖가지 뒤섞인 6진(塵)의 인연이 있고, 안으로는 뒤바뀐 생각[心想]이 생멸하고 상속하기 때문에 억지로 마음이라 한다.’
이와 같이 마음 가운데서는 실로 마음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心相]을 얻을 수 없다.
이 마음의 성품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 항상 깨끗한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거늘 객진번뇌[客煩惱]16)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에 집착되기 때문에 부정한 마음이라 한다.
마음은 스스로가 알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이 마음은 마음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공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근본이나 지말에 진실한 법이 없다. 이 마음은 모든 법과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지나간 시간ㆍ다가올 시간ㆍ현재의 시간도 없으며, 빛 없고 형상 없고 대할 수도 없다. 다만 뒤바뀐 허망에서 생긴 것이다. 이 마음은 공하여 나 없고 내 것도 없으며, 무상하고 진실됨이 없다.
이것을 일컬어 ‘마음을 수순하는 관법’이라 한다.
마음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무생임을 알면 무생법[無生法]에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남이 없고, 성품이 없고,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는 까닭이다.
지혜로운 이는 능히 아나니, 지혜로운 이는 비록 이 마음의 생멸하는 특징 또는 성질{모습}을 관찰하면서도 실제로 생멸하는 법을 얻거나 더럽고 깨끗함을 분별치 않으나 마음의 청정을 얻는다. 이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객번뇌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안의 마음을 관찰하고, 밖의 마음을 관찰한다.
안팎의 마음을 관찰함도 또한 이와 같다.}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이때 이렇게 생각한다.
‘일체법이 인연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에 자성이 없으니, 이것이 진실한 공이다. 진실한 공인 까닭에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고,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는 까닭에 지음이 없고, 지음이 없는 까닭에 법이 일어나거나 혹은 멸하거나 머무름을 보지 않는다.’
이러한 지혜에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의 문에 들어간다.
이때 비록 모든 법의 생멸을 관찰하나 또한 무상문(無相門)에도 들어가나니, 왜냐하면 일체법이 모든 특징 또는 성질{모습}을 여읨은 지혜로운 이라야 깨닫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마음을 대상 가운데 묶어두어 모든 법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을 수순하되 몸ㆍ느낌ㆍ마음ㆍ법을 생각하지 않으며, 이 네 가지 법이 처할 바가 없는 줄 안다. 이것이 안의 법념처이다.
구마라집 한역, 차차석 번역 (K.991, T.614). 《좌선삼매경》 하권:
인연 따라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며, 갖가지로 괴롭기 때문에 고(苦)이며, 몸에는 36가지 물건이 있기 때문에 부정(不淨)하며,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니, 이와 같이 관함을 익혀서 내신(內身)을 관하고 외신(外身)을 관하며, 나아가 내외신(內外身)을 관한다.
이와 같은 관법을 익히면, 이것을 일러 신념지(身念止)라고 한다.
구마라집 한역, 차차석 번역 (K.991, T.614). 《좌선삼매경》 하권:
몸의 실상(實相)이 이와 같은데, 무슨 까닭에 여기에서 뒤바뀐 견해를 일으켜 이 몸을 애착하는가?
몸으로 느끼는 즐거운 느낌[樂痛 = 樂受]을 자세히 사유하고 알아차려라. 즐거운 느낌을 애착하기 때문에 이 몸에 집착하는 것이니, 마땅히 즐거운 느낌은 진실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관해야만 한다.
구마라집 한역, 차차석 번역 (K.991, T.614). 《좌선삼매경》 하권:
안식도 이 불과 같다. 따라서, 안식은 눈에도 머물지 않고, 물질에도 머물지 않으며, 눈과 물질의 중간에도 머물지 않으므로, 항상 머물러 있는 곳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은 아니다.{안식도 또한 그러해서, 눈에도 머물지 않고 물질에도 머물지 않으며, 두 가지 중간에도 머물지 않고, 머무는 곳이 있지 않으며,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허깨비와 같고 요술과 같으니, 현재의 마음으로 과거의 마음을 관하면 혹은 괴로움이고, 혹은 즐거움이며, 혹은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다. 마음은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 욕심이 있든 욕심이 없든 역시이와 같아서,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 안의 마음을 관하든 밖의 마음을 관하든, 아니면 안팎의 마음을 관하든 역시 이와 같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심념지(心念止)라고 이름한다.
구마라집 한역, 차차석 번역 (K.991, T.614). 《좌선삼매경》 하권:
또한 마음은 누구에 속한다고 관하는가?
상(想)ㆍ사유(思惟)ㆍ염(念)ㆍ욕(慾) 등의 온갖{여러 가지} 마음이 서로 응하는 법[心相應法]과 서로 응하지 않는 법[不相應法]을 관찰하여{관하고}, 그 주인을 자세히 찾으려고 해도{관하여도} 주인은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연 따라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며,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이고, 괴로움이기 때문에 자재하지 못하며,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인이 없고, 주인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앞에서는 몸과 느낌과 마음의 법이 얻을 수 없는 것임을 특별히 관하였으니, 이제 다시 4념지(念止)를 총괄하여 관하여도{중에서도} 주인을 얻을 수 없으며 개별로 관하여도 주인을 얻을 수 없다{이곳을 여의고 구하여도 얻을 수 없음을 총체적으로 관한다}.
구마라집 한역, 차차석 번역 (K.991, T.614). 《좌선삼매경》 하권:
만일 항상함[常]을 얻을 수 없다면, 무상(無常)도 역시 얻을 수 없다. 만일 항상하다면 마땅히 항상 괴롭고 항상 즐거워서 역시 마땅히 잊어서는 안 된다.
만일 항상 정신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죽임도 괴롭힘도 죄도 없고{살뇌죄(殺惱罪)가 없고} 역시 열반도 없으며, 만일 육신이 바로 정신이라면 무상한 몸이 없어지면 정신도 역시 없어져야만 하며, 또한 후세도 없고 죄와 복도 없다.
이와 같이 두루 주인이 없음을 관하면, 일체의 존재는 모두가 공이며 자재하지 못해서, 인연이 화합하기 때문에 생기고 인연이 무너지기 때문에 없어진다.
이와 같이 인연이 화합하여 법이 되니, 이것을 법념지(法念止)라고 한다.
구마라집 한역, 차차석 번역 (K.991, T.614). 《좌선삼매경》 하권:
마음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고 또한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는 것도 받는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무엇이 마음인가?
이 마음은 무상(無常)하여, 인연을 쫓아 생겼다가 멸하는 것으로 머물지 않는다. 등류 상속하여 생겨나기[相似生] 때문에, 이를 알지 못하는 전도된 인식으로, 항상하는 하나의 존재가 있다고 여겨 '마음'이라고 이름붙인 것일 뿐이다. 본래 없다가 단지 지금 있는 것[本無今有 = 空卽是色]이고 지금의 있음이 지나면 없음으로 돌아가는 것[已有還無 = 色卽是空]이다. 그러므로 무상하다.
마음의 본성을 관찰해 보면 공(空)임을 알게 되니, 무엇을 공이라 하는가?
공이란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을 말한다.
눈이 있고, 물질이 있고, 눈이 볼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는 념(念)이 있고, 보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서 이와 같은 것들이 다 화합할 때 비로소 안식이 생긴다. 마치 해가 돋보기를 사랑함이 있고, 해가 있고, 돋보기가 있고, 마른 풀이 있고, 쇠똥이 있어서 이 모든 인연이 화합하여 거기에서 불이 생기는 것과 같다. 하나하나를 미루어 찾으면 불은 얻을 수 없지만, 모든 인연 즉 조건이 합하여 불이 있다.{마음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받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엇이 마음인가?
이 마음은 무상(無常)하여 인연을 좇아 생기기 때문에 생기고 없어져 머물지 않는다. 인식이 대상에 일치하고 대응하여 일어나기[相似生] 때문에, 다만 뒤바뀌었기 때문에, 이것을 항상하는 하나라고 말할 뿐이니, 본래는 현재의 존재[今有]도 없고 과거의 존재[已有]도 또한 없다. 그러므로 무상이다.
마음의 본성을 관찰해 보면 공(空)임을 알게 되니, 무엇을 공이라 하는가?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이다.
눈이 있어서 물질이 있음을 볼 수 있고 기억해서 보고자 하니, 이와 같은 것들이 화합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 마치 해가 구슬을 사랑하여 해가 있고 구슬이 있으며, 마른 풀과 쇠똥이 있어서 뭇 인연이 화합하여 여기서 불이 생기는 것과 같으니, 하나하나를 미루어 찾으면 불을 얻을 수 없지만 연(緣)이 합하여 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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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ful", 네이버 영영사전. 2022년 6월 17일에 확인. Merriam Webster 사전:
mindful:
1. bearing in mind; aware
be mindful of how you use your power
2. inclined to be aware
a stirring and important book for all mindful Americans
"mindful", 네이버 영영사전. 2022년 6월 17일에 확인. Oxford Press 사전:
mindful:
1. conscious or aware of something
I arrived home for the summer, ever mindful of my obligations to my parents
2. focusing one's awareness on the present moment, especially as part of a therapeutic or meditative technique
tune in to your body and be mindful
3. [formal] [with infinitive]
inclined or willing to do something
the judge said that he was not mindful to postpone the eviction again
"mindful", 네이버 영영사전. 2022년 6월 17일에 확인. Collins 사전:
mindful:
1. (usually postpositive and foll by of) keeping aware; heedful
mindful of your dut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