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Korean Wikipedia)

Analysis of information sources in references of the Wikipedia article "석굴암" in Korean language 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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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기영. “경주 석굴암 석굴 (慶州石窟庵石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년 5월 3일에 확인함. 1907년경 우연한 기회에 우편배달부가 일본인에게 석실이 있음을 알렸고, 그 말에 따라 발견했다고 전하여, 마치 석굴을 지하동굴에서 처음 발굴한 듯 과장하여 선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과 다른 주장이다. 오히려 토함산에서 석불이 발견되었다는 극적인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그 뒤 일본인 무뢰한들이 수많은 탑상(塔像)들을 반출해 가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적지 않은 파손행위까지 따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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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 완수 (2005년 5월 13일). “불국사가 김대성의 개인사찰로 둔갑한 까닭”. 《신동아》. 동아닷컴. 2023년 5월 3일에 확인함. 원성왕은, 경덕왕의 아들이며 성덕왕의 손자인 혜공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장본인 중 한 사람으로, 자립한 후에는 경덕왕은 물론 성덕왕의 사당까지 허물고 자신의 조부와 부친의 사당을 대신 세워 새 왕조의 개창을 표방한 것을 알 수 있다. 성덕왕과 경덕왕으로 이어지는 전왕조, 즉 진흥왕의 혈통을 이은 순수 진골 왕통과의 단절을 표방했으니 경덕왕이 성덕왕의 추복사찰로 국력을 기울여 건립해온 불국사의 건립 시말을 자세히 밝힌다는 것은 원성왕 자신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사실을 공표하는 결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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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청, 문화재청 (2023년 5월 1일). “4일부터 조계종 산하 사찰 문화재 관람료 면제”.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 2023년 5월 2일에 확인함. 오는 4일부터 대한불교조계종 산하 사찰에 입장할 때 징수하던 문화재 관람료가 면제된다. 
  • 이, 종호 (2004년 10월 16일). “석굴암 제대로 보기(2)”.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 2023년 5월 3일에 확인함.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 이, 종호 (2004년 10월 16일). “석굴암 제대로 보기(2)”.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 2023년 5월 3일에 확인함. 숙종 29년(1703)에 종열(從悅)이, 영조 34년(1758)에는 대겸(大謙)이 석굴암을 중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으나 
  • 이, 종호 (2004년 10월 11일). “석굴암 제대로 보기(1)”.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 2023년 5월 3일에 확인함. 『삼국유사』에는 “본존불을 조각하기 직전에 석굴 천장의 돌 덮개를 만들던 중 갑자기 돌이 세 조각으로 깨져 버렸다. 김대성이 분을 이기지 못하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천신이 내려와서 덮개를 다 완성시켜 주고 돌아갔다. 
  • 이, 종호 (2004년 10월 16일). “석굴암 제대로 보기(2)”.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 2023년 5월 3일에 확인함. 우선 석굴암 보수에 동원된 인력들이 모두 기차철로를 부설하는 토목기술 인력이었다. 당연하게 그들은 기차 철로의 터널처럼 석굴을 수리하겠다 
  • 이, 종호 (2004년 10월 16일). “석굴암 제대로 보기(2)”.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 2023년 5월 3일에 확인함. 1910년대 처음으로 석굴을 보수하기 이전에 했던 기초 조사의 평면도를 보면, 원형 주실의 뒤쪽과 2시 방향의 바로 옆면에 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샘물의 양은 10초에 1리터나 되는 많은 양으로 일년 내내 쏟아져 나왔다. 
  • 이, 종호 (2004년 10월 16일). “석굴암 제대로 보기(2)”.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 2023년 5월 3일에 확인함. 1913년 10월부터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하여 해체공사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1914년에는 본 공사에 들어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1915년 9월에 공사를 끝냈다. 이때 석벽을 보강하기 위해 석벽 뒤에 시멘트를 석 자나 발랐다. 그러나 1917년 누수 현상과 습기 등으로 바닥과 천장 위로 물이 스며들기 시작하자 일본인들은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장의 방수를 위해 대대적으로 재보수공사를 실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927년에는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 세척을 했다. 
  • 이, 종호 (2004년 10월 16일). “석굴암 제대로 보기(2)”.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 2023년 5월 3일에 확인함. 해방 후에도 1947년, 1953년, 1957년에 고온 증기를 사용하여 불상을 세척했다. 당시는 불상을 몇 년마다 닦아주는 것을 최상의 보존방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돌의 가는 입자가 떨어지는 등 훼손이 계속되자 중단되었다. 
  • 이, 종호 (2004년 10월 16일). “석굴암 제대로 보기(2)”.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 2023년 5월 3일에 확인함.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착수하였지만 근본적인 처방 없이 일본인들이 만든 콘크리트벽 배후로 약 1미터 가량의 공간을 두고 또다시 콘크리트로 된 돔을 씌우고 그 위에 미봉책으로 두터운 봉토(封土)를 덮었다. 더구나 개방되어야 할 석굴 전면에 목조 암자를 설치하면서 광창과 소감실 창구를 모두 없애버리고, 지하수 배수시설을 설치했다. 
  • 이, 종호 (2004년 10월 16일). “석굴암 제대로 보기(2)”.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 2023년 5월 3일에 확인함. 1966년 당국에서는 공기냉각장치를 설치하여 기계적인 방법으로 습기와 온도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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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청, 문화재청 (2021년 2월 26일). “문화재청 @chlove_u”. 《트위터》. 트위터. 2023년 5월 3일에 확인함. 본존불의 백호(白毫)는 1966년 국내산 수정을 깎아 뒷면에 순금판을 대어 복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