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sis of information sources in references of the Wikipedia article "세습군주제" in Korean language version.
To legitimise the rise to power of new tribal or dynastic groups Gaelic genealogists often forged a link between the usurper and the dynasty they had overthrown.
태자를 미리 결정한 것은, 첫째 왕위의 공백을 최소화하고, 둘째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국의 혼란을 막고 전대 왕의 정치를 안정적으로 계승하며, 셋째 일찍부터 태자로 책립해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교양과 덕목을 쌓고 군주의 자질을 함양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1087년 독일 공동 국왕으로 인정받은 하인리히 4세의 아들 콘라트 2세도 있었다. 콘라트 2세는 1093년 이탈리아 국왕으로 추대되었고, 결국 롬바르디아를 기반으로 아버지 하인리히 4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하인리히 4세는 수세에 몰렸지만 벨프 5세가 마틸데와 결별하고 자신을 찾아온 덕분에 1097년 전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듬해, 콘라트 2세를 대신해 동생 하인리히 5세가 독일 공동 국왕으로 새로이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