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호역(오랑캐 통역관)을 보내는 일로 비변사와 양사 사이 논쟁이 일어났고, 양사는 호역을 후금으로 보내는 것에 대해 반대하여 상소를 올리기를,
..."우리 나라는 명나라와 명분이 본디 정해져 있으니, 신라와 고려가 당(唐)나라와 송(宋)나라를 섬긴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임진년 난리에 명나라의 도움이 없었으면 나라를 회복할 수 없었으니, 군신과 상하가 지금까지 서로 보존하여 어육이 되지 않은 것은 누구의 힘입니까. 지금 비록 불행하여 큰 화가 당장 닥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죽음이 있을지언정 두 마음을 가져서는 아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천하 후세에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0월 6일 정축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10006_002
"우리 나라가 천조(天朝)에 대해서 의리상으로는 군신(君臣)의 관계에 있다 할지라도 정리상으로는 부자지간과 같다. 더구나 임진 왜란 때 위급한 상황을 구제해 준 큰 은혜가 있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중략) 우리나라의 군병을 조금이라도 실제로 활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2백 년 동안 대대로 황제의 은혜를 입어 왔으므로 밤이나 낮이나 감격하면서도 보답할 길을 얻지 못했는데 또 임진년부터는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덕을 중하게 받고 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28권, 광해 10년 5월 1일 무자 7번째기사 1618년 명 만력(萬曆) 46년 누르하치 토벌로 명나라에서 군병을 청한 일에 대해 전교하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1005001_007
우리 나라가 멀리 동쪽에 있어 중국에서 보기에 안남(安南)이나 교지(交趾)와 다름이 없는데도, 중국 사람들이 비천하게 여기지 않고 소중화(小中華)라고 말하는 것은, 어찌 대대로 예의를 닦아 임금은 임금, 신하는 신하, 아비는 아비, 아들은 아들 노릇함으로써, 생민의 윤리와 사물의 법칙이 그래도 볼 만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중종실록 17권, 중종 7년 12월 26일 병인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ka_10712026_001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제 전교를 받으니, 진언(陳言)하는 사람의 말 가운데 ‘우리 동방(東方)이 기자(箕子) 이래로 교화(敎化)가 크게 행하여져, 남자는 열사(烈士)의 풍(風)이 있었고 여자는 정정(貞正)의 풍이 있었으므로 역사(歷史)에도 「소중화(小中華)」라 칭하였습니다....성종실록 20권, 성종 3년 7월 10일 을사 4번째기사 1472년 명 성화(成化) 8년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307010_004
삼가 생각건대 명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거룩한 임금들이 서로 대를 이어왔는데, 우리나라가 명을 받고서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렸습니다.···우리나라가 땅이 좁고 작다고 하더라도 긴 것을 덜어 짧은 것을 보충한다면 충분히 천자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폐하의 뛰어난 덕과 큰 업적은 명나라의 계통을 계승할 만한데, 오늘날 어찌 당당한 천자의 나라로서 군주의 칭호만 가지겠습니까? ···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9월 30일 양력 3번째기사 1897년 대한 광무(光武) 1년 이수병 등이 황제로 칭할 것을 주청하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409030_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