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sis of information sources in references of the Wikipedia article "양유찬" in Korean language version.
6•25가 일어난 다음해(51년)부터 4•19(60년)까지 우리나라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10년간 駐美大使의 重任을 맡았던 梁裕燦대사(75). 그가 당시 李承晩大統領의 부름을 받은 것은 「하와이」에서 醫師로 기반을 착실히 닦아 名聲과 財物을 쌓아가고 있을 때였다. 1951년 2월 어느날, 당시 「호놀룰루」 總領事로 있던 金溶植씨가 돌연 찾아와 『釜山에 가서 李대통령을 좀 만나보라』는 전갈을 했다. … 中國人 의사 2명까지 고용, 큰 병원을 경영하고 있었던 梁씨는 그래서 李大統領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駐美大使로 가 달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돌연한 이말에 梁씨는 外交를 전혀 모를 뿐 아니라 한창 번창하고 있는 병원사업에서 손을 떼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固辭했다는 것. 그러자 李박사는 『네가 후손에서 백만금의 재산을 몰려주고 죽는게 나으냐, 우리 3천만백성을 살리는게 좋으냐』면서 24시간의 말미를 주더라는 것. 당사 草梁에 있던 梁聖奉 慶南知事집에 숙소를 마련해주어 하룻밤 묵은 후 이튿날 아침 李박사에게 『제가 꼭 도움이 되겠다면 가겠읍니다』고 하면서 『내가 젋을 적에 너를 가르쳤다. 나는 혼자 생각하기를 네가 자라서 나와 함께 나라를 위해서 일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이제 기회는 왔다. 너는 가서 전쟁으로 먹고입을 것을 다 잃은 3천만 민족을 먹여살려야 한다』고 말하더라고 梁대사는 당시를 회고했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韓國의 親善使節인 梁裕燦大使는 五日 西獨의 「콘라드 · 아데나워」 首相을 訪問함으로써 三日間의 西獨訪問을 終結하였다 그들은 約一時間에 걸쳐 西獨의 首相官邸에서 會談하였다 西獨과 韓國은 不遠한 將來에 正式外交關係를 樹立하자는데 合意를 보았다
6•25가 일어난 다음해(51년)부터 4•19(60년)까지 우리나라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10년간 駐美大使의 重任을 맡았던 梁裕燦대사(75). 그가 당시 李承晩大統領의 부름을 받은 것은 「하와이」에서 醫師로 기반을 착실히 닦아 名聲과 財物을 쌓아가고 있을 때였다. 1951년 2월 어느날, 당시 「호놀룰루」 總領事로 있던 金溶植씨가 돌연 찾아와 『釜山에 가서 李대통령을 좀 만나보라』는 전갈을 했다. … 中國人 의사 2명까지 고용, 큰 병원을 경영하고 있었던 梁씨는 그래서 李大統領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駐美大使로 가 달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돌연한 이말에 梁씨는 外交를 전혀 모를 뿐 아니라 한창 번창하고 있는 병원사업에서 손을 떼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固辭했다는 것. 그러자 李박사는 『네가 후손에서 백만금의 재산을 몰려주고 죽는게 나으냐, 우리 3천만백성을 살리는게 좋으냐』면서 24시간의 말미를 주더라는 것. 당사 草梁에 있던 梁聖奉 慶南知事집에 숙소를 마련해주어 하룻밤 묵은 후 이튿날 아침 李박사에게 『제가 꼭 도움이 되겠다면 가겠읍니다』고 하면서 『내가 젋을 적에 너를 가르쳤다. 나는 혼자 생각하기를 네가 자라서 나와 함께 나라를 위해서 일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이제 기회는 왔다. 너는 가서 전쟁으로 먹고입을 것을 다 잃은 3천만 민족을 먹여살려야 한다』고 말하더라고 梁대사는 당시를 회고했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