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조가 당나라 조정에 투항하여 무태군절도사에 임명된 시기는 기록마다 다르다. 《자치통감》에서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라고만 하고 구체적인 시기를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1]호삼성은 왕건조가 문덕 원년(888년)에 검중도관찰사 직을 얻었다고 주석을 달았고,[16]엄연(嚴衍)도 888년 중에 조정에서 곽우를 형남절도사에 임명함과 동시기에 왕건조를 무태군절도사에 임명하였다고 명시하는 한편[17] 호삼성의 주석을 따랐다.[18] 한편, 오정섭(吳廷燮)은 890년에 검중도관찰사가 절도사로 승격되어 무태군(武泰軍)의 군액(軍額)을 하사받은 것으로 보아, 왕건조가 당나라조정에 투항하여 절도사에 임명된 시기를 890년으로 추정하였다.[19] 욱현호(郁賢皓)는 건녕 2년(895년)에 임명된 것으로 비정하였으며,[20] 《신당서》 권190의 성예의 열전에서도 왕건조가 그 해(895년) 무렵에 당시의 황제였던 당 소종으로부터 무태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고 한다.[11] 그러나 호삼성과 엄연이 왕건조는 곽우가 형남절도사에 임명됨과 동시에 무태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고 명시하였으므로, 그 시기는 888년 중에 해당한다. 《신당서》의 권69의 방진표(方鎭表) 제6에 의하면, 이 당시 무태군의 명칭은 검중도관찰사였으며, 검중도는 대순 원년(890년)에 관찰사에서 절도사로 승격되어 무태군의 군액을 하사받았다[21](단, 《자치통감》 및 호삼성의 주석과 엄연의 《자치통감보》는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현대 중국(중화민국)의 역사가이자 작가인 백양(柏楊)은 왕건조가 888년4월에 검중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890년에 검중도관찰사가 무태군절도사로 승격되면서 절도사에 승진·유임된 것으로 보고, 그가 당나라 조정에 투항하여 임기를 시작한 시기를 888년4월 중에 있었던 일로 비정하였다.[22]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왕건조는 그 해(888년) 중에 당나라조정에 투항하여 조정으로부터 검중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2년 후인 890년에 검중도관찰사가 무태군절도사로 승격되면서 절도사로 승진함과 동시에 유임된 것이 된다. 이에 따라 본 문서에서는 호삼성의 주석과 《자치통감보》의 기록이 시기상 가장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신당서》 방진표 및 《백양판 자치통감》의 기록을 추가로 반영하여 해당 시기를 888년4월 중에 있었던 일(절도사의 전신인 관찰사까지 소급하여 포함)로 기술한다.
《신오대사》의 권63 전촉세가(世家)에는 검남(黔南)절도사왕조(王肇)로 기록되어 있다.[28]진원(陳垣)은 전촉의 황제가 된 왕건의 휘를 피하여 왕건조의 이름에서 '건' 자를 지워 '왕조'라고만 표기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9]
왕건조가 당나라 조정에 투항하여 무태군절도사에 임명된 시기는 기록마다 다르다. 《자치통감》에서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라고만 하고 구체적인 시기를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1]호삼성은 왕건조가 문덕 원년(888년)에 검중도관찰사 직을 얻었다고 주석을 달았고,[16]엄연(嚴衍)도 888년 중에 조정에서 곽우를 형남절도사에 임명함과 동시기에 왕건조를 무태군절도사에 임명하였다고 명시하는 한편[17] 호삼성의 주석을 따랐다.[18] 한편, 오정섭(吳廷燮)은 890년에 검중도관찰사가 절도사로 승격되어 무태군(武泰軍)의 군액(軍額)을 하사받은 것으로 보아, 왕건조가 당나라조정에 투항하여 절도사에 임명된 시기를 890년으로 추정하였다.[19] 욱현호(郁賢皓)는 건녕 2년(895년)에 임명된 것으로 비정하였으며,[20] 《신당서》 권190의 성예의 열전에서도 왕건조가 그 해(895년) 무렵에 당시의 황제였던 당 소종으로부터 무태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고 한다.[11] 그러나 호삼성과 엄연이 왕건조는 곽우가 형남절도사에 임명됨과 동시에 무태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고 명시하였으므로, 그 시기는 888년 중에 해당한다. 《신당서》의 권69의 방진표(方鎭表) 제6에 의하면, 이 당시 무태군의 명칭은 검중도관찰사였으며, 검중도는 대순 원년(890년)에 관찰사에서 절도사로 승격되어 무태군의 군액을 하사받았다[21](단, 《자치통감》 및 호삼성의 주석과 엄연의 《자치통감보》는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현대 중국(중화민국)의 역사가이자 작가인 백양(柏楊)은 왕건조가 888년4월에 검중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890년에 검중도관찰사가 무태군절도사로 승격되면서 절도사에 승진·유임된 것으로 보고, 그가 당나라 조정에 투항하여 임기를 시작한 시기를 888년4월 중에 있었던 일로 비정하였다.[22]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왕건조는 그 해(888년) 중에 당나라조정에 투항하여 조정으로부터 검중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2년 후인 890년에 검중도관찰사가 무태군절도사로 승격되면서 절도사로 승진함과 동시에 유임된 것이 된다. 이에 따라 본 문서에서는 호삼성의 주석과 《자치통감보》의 기록이 시기상 가장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신당서》 방진표 및 《백양판 자치통감》의 기록을 추가로 반영하여 해당 시기를 888년4월 중에 있었던 일(절도사의 전신인 관찰사까지 소급하여 포함)로 기술한다.
《신오대사》의 권63 전촉세가(世家)에는 검남(黔南)절도사왕조(王肇)로 기록되어 있다.[28]진원(陳垣)은 전촉의 황제가 된 왕건의 휘를 피하여 왕건조의 이름에서 '건' 자를 지워 '왕조'라고만 표기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