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동아] 왜구의 본질 흐리는 ‘토착왜구’..... 왜구가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해적 집단이란 주장을 처음 들고 나온 나카무라 히데다카(1902~1984)다..(중략)....1945년 일본 패전 때까지 무려 19년간 조선사편수회에서 황국사관과 식민사관의 주구(走狗)로 활동한 인물이다...(중략)...30년 가까이 왜구를 연구해온 이영 방송통신대 교수(일본학)에 따르면 이 나카무라에 의해 왜곡된 왜구관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왜구는 일본 전국시대 규수 일대 다이묘들의 지시를 받고 움직인 정규군사 집단이었으며 여기에 참여한 조선인은 극소수였다. 나카무라는 이런 왜구의 실체를 감추기 위해 고려사와 조선사를 교묘하게 짜깁기 해 역사에 기록된 왜구의 상당수가 왜구로 가장한 조선인이라는 학설을 유포한 주역이다. 그는 이를 지칭하기 위해 ‘가왜((假倭)’라는 용어를 썼다.
[주간동아] 왜구의 본질 흐리는 ‘토착왜구’......이영 교수는 ‘왜구와 고려·일 본관계사’ 및 ‘황국사관과 고려말 왜구’ 같은 저술을 통해 그 허구성을 낱낱이 파헤쳤다....(중략)...나카무라는 왜 이런 왜구의 정체를 감추려했을까. “에도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 유신 세력은 1333년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남조의 고다이고(1288~1239) 일왕과 그를 도운 구스노키 마사시게(1294~1336)를 자신들의 역할모델로 삼았습니다. 메이지일왕 역시 혈통 상 북조를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다이고 일왕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천명했습니다. 그런데 노략질을 일삼은 왜구의 배후가 고다이고 혈통이 다스린 남조임이 밝혀지는 것이 곤혹스러웠던 겁니다. 그래서 왜구를 일본 조정과 무관한 민간인집단으로 둔갑시키거나 다국적 연합세력이라고 물타기를 하는 겁니다.”
[세종실록 114권] 세종 28년 10월 28일 임술 1번째기사...... 臣聞前朝之季, 倭寇興行, 民不聊生, 然其間倭人不過一二, 而本國之民, 假著倭服, 成黨作亂, 是亦鑑也 신이 듣자옵건대, 고려 왕조의 말기에 왜구(倭寇)가 흥행(興行)하여 백성들이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간의 왜인(倭人)들은 〈10명에〉 1, 2명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본국(本國)의 백성들이 거짓으로 왜인의 의복을 입고서 당(黨)을 만들어 난을 일으켰으니, 이것도 또한 지난 잘못을 거울로 삼아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아니하도록 경계해야 하는 일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왜구 [Japanese invaders, 倭寇]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고려 때의 기록에서 왜구는 두 시기에 발생하였다. 1223년(고종 10)에 왜구가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에 침입했다는 기록이 첫 번째 침입이다. 이때는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가 몽골과 전쟁을 수행하던 기간이었다. 몽골이 일본을 침공하기 전인 1265년까지 왜구는 11회 고려를 침입한 기록이 있는데, 이를 ‘13세기 왜구’라고도 한다. 몽골의 2회에 걸친 일본 침공 이후 14세기 중엽까지 80여년 동안 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산대첩 [鴻山大捷]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이 해 7월 왜구가 충청남도 연산(連山)에 있는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하여 원수(元帥) 박인계를 죽이는 등 행패가 심하자 최영은 자진해서 출정하여 왜구를 거의 전멸시켰다. 그 공로로 시중의 관직을 받았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이 싸움에서 최영은 몸에 적의 화살을 맞고도 끝까지 부하들을 진두 지휘하였으며, 이 싸움 후부터 왜구들은 최영을 백수 최만호(白首崔萬戶)라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