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sis of information sources in references of the Wikipedia article "월미도" in Korean language version.
. 인천부의 포진(鋪陳)·그릇·염장(鹽醬)·젓갈류는 조정에서 이미 준비하였는데 영종진에도 유사시에 대비할 각종 물품이 있어야 하겠고, 인천에서 영종도에 이르는 중간에 어을미도(於乙未島)가 있는데 거기에 기와집을 지어 유사시에 어가가 쉬시는 곳으로 삼기로 한 것은 모두 뜻이 있는 일이니 그중에서 갖추어야 할 물건은 일일이 준비하고 준비한 뒤에 혹 오래 묵어 쓰지 못할 것이 있으면 해마다 개비(改備)한다.
그러므로 중간 어미도(於味島)에 건물을 지어 급박할 때에 잠시 머무는 곳으로 삼았습니다. 해가 오래되어 쓸리고 무너져 현재 수리하려 하나 공사가 작지 않아 일의 체통이 가볍지 않습니다.
재월미도(在月尾島) 자좌오향(子坐午向) 정전팔간(正殿八間) 동월랑사간(東月廊四間) 서월랑사간(西月廊四間) 남월랑칠간(南月廊七間) 수직간삼간(守直間三間) 내중문일간(內中門一間) 외중문일간(外中門一間)
'영종(永宗)의 행궁(行宮)이 월미도(月尾島)에 있는데 돌보며 지키는 사람이 없이 무너지도록 버려 두었으니 애당초 설치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금은 단지 한 명의 중이 보살피며 보호하고 있어 일의 성격이 더욱 간단히 일시적으로 미봉하는데 관계되니 영종첨사(永宗僉使)로 하여금 보살피며 지키는 사람을 각별히 가려 뽑도록 하고, 무너진 곳 또한 해진(該鎭)으로 하여금 그때그때 보수하게 하는 것이 아마 적합할 듯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아뢴대로 하라고 하였다.
'인천부(仁川府)의 행궁과 영종진(永宗鎭) 월미도(月尾島)의 행궁에 본조(本曹)의 낭청을 보내 적간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방관이 전례에 따라 거행할 일이라서 본조에서 고침으로써 전에 없는 폐단을 만드는 것은 부당합니다. 고칠 때가 되어 각읍(各邑) 공해(公廨)를 다시 짓는 일을 비국(備局)에 보고하면 물력(物力)을 보태주는 예가 있습니다. 이번에도 이 예를 따라 거행하도록 해읍과 해진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리 하라 하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윤자덕(尹滋悳)의 장계(狀啓).
인천 부사(仁川府使) 이남집(李南輯)의 첩정(牒呈)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이번 달 16일 미시(未時)에 저들의 배가 영종 경내 월미도(月尾島) 뒷 바다에 닻을 내렸으므로 노문(勞問)을 위해 지금 막 배를 타고 나가며, 저들의 배가 있었던 동래부(東萊府)의 통사 박기종(朴琪淙)이 저들 네 명과 함께 종선(從船) 한 척을 타고 본부 제물포(濟物浦)에 와서 정박하여 급수를 하고 떠났습니다.'라고 하였다.
인천개항과 관련된 제1회 담판서(談判書)는 공신(公信) 제5호로 진정(進呈)해 두었습니다. 별지 담판서 제2회부터 제4회와 같이 담판하였는데, 인천에 항구를 정하는 것으로는 하였지만 개항의 기한(期限)은 몇 년 후로 늦추자고 하여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이쪽에서는 오는 명치(明治 15년(1882년) 4월을 개항 시기로 하자고 담판하고 있습니다만 작금(昨今)은 저들의 새해에 해당하여 잠시 공식 담판을 보류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확정된 회답도 오지 않았습니다.
인천개항 일건에 대한 담판은 몇 차례 진행되었지만 똑같은 말뿐이라서 결말이 나지 않았습니다.
인천개항을 내년 중에 착수하는 것으로 결정했다는 어기(語氣)를 약간 드러냈음은 공신 제13호로 상신하였습니다. 그 후 두 차례 담판을 거쳐 오늘 28일에 별지(인천개항 일건 담판 제6회)의 대의(大意)처럼 올해 2월부터 기산(起算)하여 20개월을 기한으로 내년 9월에 개항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본론만 말씀드립니다. 우리 정부에서 앞서 소총(小銃) 약간 종(種)을 귀 정부에 증정하면서 본 사신이 대략 말씀드리기를, 총기의 고금의 연혁(沿革)이 갈수록 정교해지고 기묘한 기술이 담긴 것으로 한 사람에게 주면 열 사람을 감당할 수 있으니 병세(兵勢)에 있어서도 크게 변화를 준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일찍이 강수관(講修官)에게 알려 귀 정부에서 육군과 해군 군제(軍制)를 확장하고 각종 공업(工業)을 진흥시키고자 하여 교사(敎師)를 필요로 한다고 하는데, 기술자라면 우리 정부에서 천거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비록 귀 정부의 하고자 하는 바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요청하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였는데, 이웃 나라에서 교사를 초빙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서 그런 것입니까. 익숙해지는 데에는 선후가 있고 술업(術業)에는 전공이 있으며, 게다가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귀 정부에서는 이를 어떻게 할 것입니까. 병사를 훈련시키고자 한다면 시행하는 조치가 있어야 합니다. 시기를 놓치기 십상인데 헛되이 날짜만 보내고 있는 것이 오래이니, 대사를 이루지 못하게 될까 걱정입니다. 이제 본 관(館)의 육군 소위(少尉) 호리모토 레이조[掘本禮造]는 병학교(兵學校) 출신으로 병사를 훈련시키는 데에 익숙합니다. 이에 먼저 소위를 천거하여 임시로 그 일을 맡게 하면 또한 시일을 흘려보내지 않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에 천거합니다. 이를 위하여 삼가 아뢰며 아울러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올립니다.
오늘 오후 5시에 난민 수 백 명이 공사관을 둘러싸고 방화하며 공격하였고, 관원이 사력을 다하여 방어한지 7~8시간이 지나도 끝내 귀 정부에서 군사를 보내어 구원해주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포위망을 뚫고 벗어나서 먼저 관찰사가 있는 감영에 가서 보호를 의뢰하고자 하였으나 응접하는 사람이 없어서, 다시 남대문을 통하여 대궐로 들어가려 했으나 문이 봉쇄되어 열리지 않아, 부득이하게 인천부로 가기위해 양화진에서 길을 떠날 것이며, 이에 서신 1통을 써서 진장(鎭將)에게 부탁하여 전달해달라고 하는 것이니, 귀 정부에서는 속히 파병하여 폭도를 진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일본국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삼가 아룁니다.
제가 앞서 우리 황제폐하의 명을 받들어 귀 국에 주차한지 몇 개월이 되지 않았으니 무엇을 헤아리겠습니까. 이번 달 23일 난민들이 청수관(淸水館)을 방화하니 수원(隨員)들이 힘을 다해 방어하다가 밤이 되었는데, 귀 조정이 파병하여 구원해줄 것을 간절히 바라였으나 끝내 그러한 일은 없었으므로, 포위망을 뚫고 벗어나서 대궐로 들어가려 하였지만 숭례문(崇禮門)이 닫혀 있어 부득이하게 인천부로 피할 수밖에 없었고, 인천부의 보호를 받고자 하였으나 인천부 군사 또한 난적과 합세하여 다시 피습해 오므로 수원들이 많이 죽였으며, 형세가 막아낼 수 없는 것이었기에 재차 제물포로 피하여 배를 탔는데, 다행히 영국 군함을 만나 지금 귀국하여 본국에 보고하려 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제가 명을 받들어 서울에 주재하여 갑자기 이러한 변란을 만나 돌연 귀국하게 되었으니 매우 유감이며, 수원 중 비록 생사가 확실하지 않은 자가 있어도 성상의 주의가 미치는 곳에서 반드시 각자가 목숨을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에 특별히 이러한 사유를 아뢰며, 가까운 날에 다시 건너와서 알현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성상(聖上)의 열람을 바라며, 아울러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이달 23일 오후 5시 격도(激徒) 수백 명이 갑자기 봉기하여 공사관을 습격하여 시석(矢石)과 총환(銃丸)을 날리고 방화하여 불태웠다. 진력하여 방어한지 7시간이 지났지만 정부의 원병이 오지 않았다. 한 쪽을 돌파하여 왕궁으로 가려해도 성문이 열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인천으로 후퇴하여 휴식하는 중에 인천부의 병사가 또 갑자기 봉기하여 습격했다. 순사 2명이 즉사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외에 사상자가 있다. 겨우 뚫고나와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26일 남양 앞바다에서 영국 측량선 플라잉 피시를 만나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 부상자까지도 무사하다. 지금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러시아인이 仁川 月尾島(인천 월미도)에 煤炭庫(매탄고)를 설치하였다.
외부소관 인천부영종진월미도 러시아인 煤庫병원터내 민의 무덤 이장비를 예산외에서 지불하기위한 청의서
무선전신시설(無線電信施設)은 월미도(月尾島), 목포(木浦) 항문도(港門島)(목포항(木浦港)) 및 소청도(小靑島)(해주(海州)冲) 4개처(個處)에 있으며 이것은 구한국시대(舊韓國時代)로부터 설치되어 있는 것이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는 공중용(公衆用)으로 사용(使用)을 금(禁)하고 있다.
오전 7시 25분 기차로 월미도 해수온천에 갔다. 6월 21일부터 오늘까지 해수목욕을 하러 총 14번 왕복한 셈이다. 지독하게 건조하고 무더운 날씨가 몇 달째 계속되었던 차에 이 왕복행차가 내 건강에 요긴했음에 틀림없다. 건강을 지켜주신 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11시 5분 기차로 경성에 돌아왔다.
【인천(仁川)廿일발합동(日發合同)】지난 십팔일수만명(十八日數萬名)의 유람객(遊覽客)이 모인 월미도(月尾島)에서 단선반대(單選反對)의 『삐라』를 다수산포(多數散布)한 사실(事實)이있었는데 부내(府內)도 원동사(園洞四)가리(里)에서도 오십여명(五十餘名)의 군중(衆)이 단선반대남북협상절대지지등(單選反對南北協商絶對支持等)의 『프랑카―트』를앞세우고 시위행렬(示威行列)을 하다가 해산(解散)을 당(當)하였다한다 그리고 한편(便) 지난 십륙일시흥군(十六日始興郡)수암면성(岩面城)포리근처(里近處)에서는 전주삼개(電柱三個)를 철거(撤去)한 사질(事質)이잇서 부평대전간통화(富坪大田間通話)가 일시부통(一時不通)되였다한다
【인천일일발합동】경감이라 사칭하고 현직경관을 농락한 우습고도 웃지못할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주소를 서울에 둔 김의선(金義善)이라는 자는 경무부수사국정보과근무 경감이다 사칭하고 지난 십구일하오경 인천현직경관이 중심이된 친목회에 당당히 참석, 팔미도까지 선유하는동안 상좌의 후대를 받고 제이차로 월미도모료정에서도 상빈의 호화로운 대접을 받고 있든 중 정체가 탄로되어 동석경관의 연락으로 드듸어 체포되고 말었다 한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인천부(仁川府)부터 제물도(濟物島)까지는 7, 8리이고 제물부터 자연도(紫燕島) 태평암(太平巖)까지는 10리이고 자연부터 강도 덕포까지는 30리인데, 수로(水路)가 매우 좁아서 한겨울에는 혹 얼어 막히게 되나 며칠 지나지 않아서 녹아 흐르므로 오히려 경쾌선(輕快船)은 다닐 수 있고, 제물과 자연 사이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녹아 흐를 때에는 또한 모두 다닙니다.'
도비곶(道非串)·능도(菱島)·연도(連島)·미연도(未然島)·흑악소을벌(黑嶽所乙伐)·조창성(鳥槍城)·이산성(二山城)·실직판(實直板)·휴곡(休谷)·직악천현(直嶽遷峴)·이악(泥嶽)·돌도(突島)·내저도(內儲島)·눌도(訥島)·구수도(狗首島)·직부도(直父島)·외흘니곤(外屹泥坤)·산산(蒜山)·낭곶(狼串)·황도(荒島)·견인도(見人島)·사지포(史知浦)·도림성(道臨城)·두광(豆廣)·황술(荒述)·증미(甑尾)·황석자(黃石子)·해성(海城)·각산의 유성(杻城)·창성(槍城)·골목액(骨木額)·송산(松山)·탄항관(炭項關)·적술(賊述)·저산(猪山)·대사간봉(大沙間峰)·이을악(伊乙嶽), 【이상은 여러 섬에 있는 것으로서 소재를 알 수 없다. 】
그러나 고(故) 상신(相臣) 홍명하(洪命夏)는 행궁(行宮)214) 을 인천(仁川)과 월미도(月尾島)에 설치하기를 건백(建白)하였습니다.
하교하기를,
'개항 등에 관한 일을 다시 먼저 말하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가 한 번 사적으로 묻기에 조정의 의견은 전과 다름이 없다고 대답했더니 더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민겸호(閔謙鎬)가 아뢰기를,
요사이 일본 사신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가 신(臣)과 예조 판서(禮曹判書) 홍우창(洪祐昌)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군사들을 뽑아서 군사 훈련을 시키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다. 육군 소위(陸軍少尉) 호리모도 레이조[掘本禮造]를 추천하여 훈련하고 교육시키는 스승으로 삼고, 또한 교장(敎場)을 선정하여 군사 훈련에 종사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대체로 두터운 우의(友誼)에서 나온 말이므로 그의 뜻을 저버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중략)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군사를 뽑아 조련(操鍊)시키는 등의 일은 절목(節目)을 마련하고 장령의 직임은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에 구애하지 말고 가려 차임하도록 하라.'
하였다.
월미도(月尾島) 부지 조차 약정서가 체결되었다.
〈조차월미도지기약단(租借月尾島地基約單)〉
이에 일본 정부는 해군을 위한 창고를 건조하고 석탄을 저장하기 위해 조선 경기도(京畿道) 월미도(月尾島) 중의 부지 총 4,900평(坪)을 【한 평은 사방 2미터이다.】 조차한다.
이 부지의 조차액(租借額)은 매년 은화 80원(圓)을 조선 정부에 완납하는 것으로 정하며, 바로 약정을 교환한 날로부터 계산하여 일본 공사관에서는 매 양력 12월 15일에 이듬해의 조차액을 미리 통리아문(統理衙門)에 교부하여 사수(査收)한다.
이에 약정서를 체결하고 아울러 지도를 첨부하여 신용을 밝힌다.
대조선 개국 499년 12월 12일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민종묵(閔種默)
대일본 명치 24년 1월 21일
대리공사(代理公使) 곤도 모토스케〔近藤眞鋤〕
'(전략)김준희, 임원상은 법의 뜻을 생각지 않고 몰래 문빙(文憑)을 만들어 막중한 공토(公土)를 외국인에게 천매(擅賣)하였으니 그 죄상을 따지면 해당하는 형률이 있을 것이나 미리 기미를 눈치 채고 도망쳐 버렸기 때문에 붙잡지 못하였습니다. 피고 김준희, 임원상은 《대명률(大明律)》 〈명례(名例)의 범죄사발재도조(犯罪事發在逃條)〉의 범죄 사실이 드러난 후 도망친 자는 여러 증거가 명백한 경우 사건이 성립된 것과 동일하여 심문할 것이 없다는 법조문, 「외국에 의뢰하여 나라의 체모를 치손한 자의 처단 예」 제2조에 비추어 다음의 범죄자는 이수, 미수를 막론하고 《대명률》 〈적도편(賊盜編) 모반조(謀叛條)〉에 비추어 처단한다는 규정, 같은 조 제6항 각 국과의 약장(約章)에 허용한 지역을 제외한 일체의 전토, 삼림, 천택을 외국인에게 잠매한 자와 《대명률》 〈적도편 모반조〉의 모든 모반은 공모자 일지라도 수종(首從)을 가리지 않는다는 법조문, 형률(刑律) 명례(名例) 제6조에 의하여 모두 참형(斬刑)에 처하고, 피고 강면희와 정규만은 《대명률》 〈수장편(受贓編) 관리 수재조(官吏受財條)〉 녹을 받는 사람이 법을 굽히지 않은 장〔不枉法贓〕 120관의 율에 비추어 모두 태(笞) 100 종신 징역에 처하며 피고 문성진은 동 률(律) 〈사위편(詐僞編) 사전조지(詐傳詔旨) 조〉 각 아문(衙門)에 1품, 2품 아문관의 말이라고 거짓말하여 공사(公事)에 분부한 자의 율에 비추어 태 100 징역 3년에 처하고, 피고 송정섭은 동 률 〈수장편 관리 수재 조〉의 거간(居間)을 하고 돈을 받은 자율에 비추어 태 100 징역 2년에 처하며,강면희 이하 여러 범인 등은 원래 적용한 율에 의해 처단해야 하겠으나 범죄가 대사령(大赦令) 이전에 있었고 또 한 해나 갇혀 있었으니 참작하여 용서할 단서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각각 본률(本律)에서 2등을 감하여 강면희, 정규만은 모두 태 100대 징역 10년, 문성진은 태 80 징역 2년에, 송정섭은 태 80 징역 1년에 처합니다.’ 하였습니다.
당해 범인 강면희 등은 원래 적용한 율에서 감등 처리하고 김준희, 임원상은 붙잡은 다음에 율에 의해 집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라. 징역은 모두 유배형으로 바꾸라.'
하였다.
上曰, 此意, 亦詳言於御使[御史], 可矣。許積曰, 仁川浦內不缺紫燕島, 其他魚乙未島, 則當以小船用之, 尹檄頃日上來時, 言於臣等矣。
積曰, 冬月則甲串, 氷澌滿江, 故孝宗朝, 嘗議以仁 川路入紫燕島, 達于江都, 而此旣迂路, 且再乘船, 危矣. 甲串下有德浦, 築得小城於此, 事急則入保其城, 而使 百官軍民, 一齊渡江, 則便近而無難濟之患矣…上曰, 宮城觀勢爲之, 而先築德浦城可也
시내에 긴급한 도로 구거 가튼 시설은 등한히 하고 부민 직업 생활상하등 통양을 늣기지 안는 월미도 공원에 사슴 구입비 일천이백 원[...]을 계상한 것은 만만부당하다[...]결국 채결한 결과에 수정안 찬성 다수로 전긔사슴구입비 일천이백 원은 륙백원으로 감액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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