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이사금 (Korean Wikipedia)

Analysis of information sources in references of the Wikipedia article "유리 이사금" in Korean language version.

refsWebsite
Global rank Korean rank
27th place
10th place
46th place
2nd place

terms.naver.com

wikisource.org

ko.wikisource.org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 儒理尼師今立 南解太子也 母雲帝夫人 妃日知葛文王之女也或云妃姓朴許婁王之女” (유리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남해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운제부인이고 왕비는 일지(日知) 갈문왕(葛文王)의 딸이다. 혹은 왕비의 성은 박씨이고 허루왕의 딸이라고도 하였다. )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金大問則云 尼師今方言也 謂齒理 昔南解將死 謂男儒理·壻脫解曰 吾死後 汝朴昔二姓 以年長而嗣位焉 ”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가 장차 죽을 즈음에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고 하였다. )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儒理齒理多 乃與左右奉立之 號尼師今” (유리의 잇금〔齒理〕이 많았으므로 이에 좌우의 신하와 더불어 그를 받들어 세우고 이사금이라 불렀다. )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大赦” (즉위 2년(25년) 봄 2월에 친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五年 冬十一月 王巡行國內 見一老嫗 飢凍將死曰 予以眇身居上 不能養民 使老幼至於此 極 是予之罪也 解衣以覆之 推食以食之 仍命有司 在處存問 鰥寡孤獨 老病不能自活者 給養之” ( 즉위 5년(28년) 겨울 11월에 왕이 나라 안을 순행(巡行)하다가 한 할멈이 굶주리고 얼어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내가 미미한 몸으로 왕위에 있으면서 백성을 능히 기르지 못하여 늙은이와 어린 아이로 하여금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 [왕이] 옷을 벗어서 덮어주고 밥을 주어 먹게 하였다. 그리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곳곳에 있는 홀아비와 홀어미, 부모없는 아이, 자식 없는 늙은이와 늙고 병들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위문하고 양식을 나누어 주어서 부양하게 하였다. )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 攻陷朶山城” (즉위 13년(36년) 가을 8월에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즉위 14년(37년)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으므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 (즉위 17년(40년) 가을 9월에 화려현(華麗縣)과 불내현(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十九年 秋八月 貊帥獵得禽獸獻之” (즉위 19년(42년) 가을 8월에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하여 얻은 새와 짐승을 바쳤다.)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 “三十四年 秋九月 王不豫 謂臣寮曰 脫解身聯國戚 位處輔臣 屢著功名 朕之二子 其才不及遠矣 吾死之後 卽大位 以無忘我遺訓 冬十月 王薨 葬蛇陵園內” (즉위 34년(57년) 가을 9월에 왕이 병환이 들자 신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탈해는 그 신분이 임금의 친척이고 지위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며 여러 번 공명(功名)을 드러내었다. 짐(朕)의 두 아들은 재주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내가 죽은 후에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할 것이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 겨울 10월에 왕이 죽어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