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sis of information sources in references of the Wikipedia article "자유시 참변" in Korean language version.
3·1운동 직후에 북만주의 청림교(靑林敎) 교도들이 주축이 되어 청년교도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항일군사활동을 준비하였다. 청림교는 동학의 한 교파로 만주 길림(吉林)과 북간도 지방에서 강력한 항일의식을 가지고 교세를 확대시키고 있었다. 이 단의 조직은 단장에 신포[申砲, 일명 아소래(我笑來)]였고,
피해자 측인 사할린특립의용대 측은 사망 72명, 익사자 37명, 기병(騎兵)의 추격을 받아 산중에서 힘이다하여 사망한 자 200여 명, 행방불명 250여 명으로 약 600여 명이 사망하고, 체포된 자가 917명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가해자 측인 고려혁명군정의회는 사망 36명, 포로 864명, 병자로 불참한 자 19명, 전투 중 박 일리아의 영솔하에 도망한 자 30명, 행방불명 59명이라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