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신해박해(辛亥迫害)...동양사회의 전통적인 조상제사 금지는 1742년, 교의적(敎義的)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율적(紀律的)인 잠정적 변법(暫定的辨法)에 의하여 교황청에서 금지조치가 취해진 바 있었다. 이 조치는 1939년에 교의적 결정에 의하여 조상제사가 지니는 사회적 의의를 천주교회가 인정하게 됨으로써 실효되었다.
[Godd News 카톨릭사전] 명동본당.....이곳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그보다 104년 전인 1784년의 일이다. 그 해 가을부터 수표교(手標橋)의 이벽(李檗)의 집에서 영세식이 있었고, 다음 해에는 명례방(明禮坊; 현 명동 부근) 소재 중국어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집 대청마루에 모인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정약전(丁若銓)의 3형제, 권일신(權日身)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집회를 가짐으로써 조선에 교회를 창설하였던 것이다.
[카톨릭신문] 대전교구 청양본당, 복자 이도기 순교 220주년 세미나 2018.0916......내포교회연구소 방상근(석문 가롤로) 연구위원은 ‘18세기 말 내포 교회와 정사박해’ 발제를 통해 이도기를 비롯한 100여 명이 희생된 정사박해(1797~1799)의 발생 원인과 전개 과정, 또 순교지와 순교 형식 및 순교자들의 행적·신심을 밝혔다.
방 위원은 “정사박해는 1795년 이후에 지속된 주문모 신부에 대한 추적, 급증하고 있던 충청도 지역의 교세, 1790년대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 기근의 원인을 신자에게 전가하는 분위기 등이 맞물려 일어났다”고 설명하고 “100명 이상이 순교했으나 순교자 중 이름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이도기, 박취득, 원시보 등 2014년 복자로 선포된 8명”이라고 말했다. 정사박해를 정조의 교화주의 입장에서 전개된 박해 사건으로 규정한 방 위원은 “그런 배경으로 형벌보다는 교화를 통해 천주교를 막으려 했다”며 “순교자들이 대부분 장사(杖死)한 것은 배교를 강요하며 고문을 강화한 결과”라고 말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명례방공동체 [明禮坊共同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신자들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자, 모임 장소를 수표교에서 멀지 않은 장악원(掌樂院) 앞 김범우의 집으로 옮겼는데 이곳이 행정구역상 명례방에 속했기 때문에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공동체를 오늘날 연구자들이 ‘명례방공동체(明禮坊共同體)’라고 부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해박해 [丁亥迫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전라도ㆍ경상도ㆍ서울ㆍ충청도 등지에서 2∼5월의 4개월 동안 500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거나 유배되었고, 알려진 순교자는 많지 않다. 전주에서는 이경언이, 대구에서는 박경화와 김세박(1828)이 순교했고, 1827년에 체포되었던 김대권, 신태보, 이태권, 이일언, 정태봉 등 5명은 전주 옥에, 김사건, 박사의, 이재행 등 3명은 대구 옥에 갇혀 있다가 1839년에 처형되었다. 이 옥사로 전라도지방의 천주교회는 거의 괴멸상태가 되었는데, 정해박해 때 체포된 순교자들은 대부분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대건 [金大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같은 해 8월에 주교 페레올, 신부 다블뤼(Daveluy, M. N. A.)와 서울에 돌아와서 활발한 전교활동을 폈다. 1846년 5월 서양성직자 잠입해로를 개척하다가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문초를 통하여 국금(國禁)을 어기고 해외에 유학한 사실 및 천주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임이 밝혀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티순교성지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한티란 원래 '큰 재'를 말하며 해발 600m의 깊은 산중에 1815년(순조 115) 을해박해 때부터 형성된 천주교 교우촌이다...(중략)...화전을 일구고 옹기와 숯을 구우며 한데 모여 살았는데, 이때 정착한 곳이 바로 한티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로버트 매클레이 [Robert Samuel Maclay]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1873년 감리교 선교회의 일본 미션 총리에 임명되어 요코하마[橫濱]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 무렵 차관(借款)교섭차 일본에 가 있던 김옥균(金玉均)과도 친교를 맺었다. 1884년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지시에 따라 한국의 실정을 살피기 위하여 신교도로서는 처음으로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내한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선교회 사업에 관하여 허락을 얻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1885년 H.G.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조선(朝鮮) 제물포를 통해 입국하였다. 선교활동을 위해 1년간 의학공부를 하였으며 광혜원(廣惠院, 제중원으로 변경)에서 진료와 간호를 담당하였고 제중원(濟衆院) 산하 의학교에서 물리·화학을 가르쳤다. 1886년 고아들을 모아 고아원(후일 경신학교가 됨)을 설립하였고 1887년에는 벽지전도부터 시작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 명동성당 [─明洞聖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명동성당이 자리잡은 대지는 종현(鐘峴)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일찍이 1784년(정조 8) 명례방(明禮坊: 지금의 명동 부근) 소재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이승훈(李承薰)과 정약전(丁若銓)의 3형제, 권일신(權日身) 형제 등이 모여 종교집회를 가짐으로써 조선천주교회가 창설된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