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양씨 기록에 따르면 양장공이 창원이씨가 별세한 이후 찬성을 지낸 양지수(楊之壽)의 딸을 재취한 것이 된다. 이 기록대로라면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유년기에 양수척이라는 천민에 의해 키워진 것이 아닌 계모 청주양씨 아래에서 성장하다 계모 청주양씨도 일찍 졸하여 양장공이 세 번째 부인으로 안동권씨를 제취한 것이 된다.
또한 창원이씨 묘지를 이장하며 세웠던 비석이 토호들의 투장으로 파비되었었는데 이 파비에 정렬공이 3명의 누이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3명의 누이가 정확히 창원이씨 소생인지와 손위와 손아래 기록은 밝혀진 것이 없고, 단 한분의 출가 기록만이 알려지고 있다. 파비의 기록과 청주양씨 기록을 바탕으로 해석하면 이 세분 누이의 손 위아래 관계에 따라서는 안동권씨 소생인 아우 최윤복, 최윤온과 나이 터울이 10살 이상 차이나는 것도 설명이 가능하다. 한국명문 청주양씨 기록[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청주양씨 기록에 따르면 양장공이 창원이씨가 별세한 이후 찬성을 지낸 양지수(楊之壽)의 딸을 재취한 것이 된다. 이 기록대로라면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유년기에 양수척이라는 천민에 의해 키워진 것이 아닌 계모 청주양씨 아래에서 성장하다 계모 청주양씨도 일찍 졸하여 양장공이 세 번째 부인으로 안동권씨를 제취한 것이 된다.
또한 창원이씨 묘지를 이장하며 세웠던 비석이 토호들의 투장으로 파비되었었는데 이 파비에 정렬공이 3명의 누이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3명의 누이가 정확히 창원이씨 소생인지와 손위와 손아래 기록은 밝혀진 것이 없고, 단 한분의 출가 기록만이 알려지고 있다. 파비의 기록과 청주양씨 기록을 바탕으로 해석하면 이 세분 누이의 손 위아래 관계에 따라서는 안동권씨 소생인 아우 최윤복, 최윤온과 나이 터울이 10살 이상 차이나는 것도 설명이 가능하다. 한국명문 청주양씨 기록[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