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 (Korean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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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자 (2009년 6월 12일). “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한겨레21 제764호. 또 645년에 쿠데타로 집권한 급진개혁 세력은 당나라와 당나라의 동맹국인 신라를 중앙집권화 지향의 개혁 모델로 삼아 신라 지배자들과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대일 관계라면 일단 소홀히 다루는 우리 국사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지만, <일본서기>(고토쿠 천황 3년)에 따르면 647년에 신라의 실세인 김춘추(602∼661)가 직접 도일해 일본 귀족들에게 ‘아름답고 쾌활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백제를 없애려는 김춘추·김유신 일파로서는 백제의 오랜 동맹국인 왜국을 백제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 박노자 (2009년 6월 12일). “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한겨레21 제764호. 백제를 고립시키려는 신라의 적극적인 대왜 외교가 결국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기본적으로는 왜국의 내부 사정이 크게 작용했다. 백제 계통으로 추정되는 유수의 호족인 소가(蘇我)씨와 긴밀한 통혼 관계를 가진, 그리고 나중에 덴지(天智·재위 661∼672) 천황으로 등극된 나가노 오에(中大兄·626∼672) 황자가 649년부터 왜국의 실권을 잡게 되어 친백제 경향은 친신라 경향보다 훨씬 우세해졌다. 
  • 박노자 (2009년 6월 12일). “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한겨레21 제764호. 나가노 오에 뒤에 있는 소가씨 등의 호족들에게 백제란 ‘우리 조상의 땅’이었을 것이란 점을 잊으면 안 된다. 거기에다 신라와 당나라의 너무나 빠른 ‘친해지기’는 왜국 지배자들에게 불안을 심어주었다. 649∼651년에 당나라 관복 제도와 궁중의례 등을 빨리 받아들인 신라의 사절인 사찬 지만(知萬)이 651년 왜국에 오자(<일본서기> 고토쿠 천황 백치 2년) 왜국 지배자들이 이를 불쾌하게 여겨 ‘신라 침공’까지 들먹였다. 
  • 박노자 (2009년 6월 12일). “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한겨레21 제764호. 그리하여 백제 부흥운동 세력들이 완전히 패배하자 왜국은 서둘러 665년부터 신라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그 뒤로는 신라의 실력자 김유신에게 ‘선물 공세’를 취하는 등 8세기 초까지 당나라와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으면서도 신라와의 교류에는 적극적이었다. 원효와 같은 신라 승려들이 나중에 본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해질 수 있는 정치•외교사적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 박노자 (2009년 7월 24일).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 통일신라-일본의 친교는 왜 잊혀졌나”. 《한겨레21》 (한겨레신문사). 2009년 7월 27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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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원(開元)은 당 현종의 연호로 개원 10년은 성덕왕 21년(722)이다. 《삼국사기》권8 성덕왕 21년 10월의 기록(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과 일치하므로 효성왕대의 일이 아니라고 보인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삼국유사”. 국사편찬위원회. 譯註 002 당 현종의 연호로 이때는 성덕왕 21년(722)이다. ≪삼국사기≫ 권8 성덕왕 21년 10월의 기록(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과 일치하므로 효성왕대의 일이 아니라고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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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윤기 교수 (2006년 8월 1일). “[홍윤기의 역사기행]②구다라스의 백제인 왕과 왕인 박사 ”. 세계일보. 2009년 7월 19일에 확인함. 약2000년 전에 일본으로 간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은 ‘벼농사법’도 전수했다. 한반도 벼농사의 도래에 관해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토대학 사학과 교수는 고고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모름지기 일본의 벼농사 문화는 한반도 남쪽인 한국을 거쳐 직접 전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한국 특유의 바둑판형 지석묘가 기타큐슈(北九州)의 조몬(繩文) 시대(BC 3세기 이전) 후기 말경부터 야요이 시대(BC 3∼AD 3세기) 전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한국의 지석묘에 있는 특유한 마제석기가 기타큐슈의 야요이 시대 전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 등은 야요이 문화 형성기에 한국과 기타큐슈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가사키현의 시마바라(島原) 반도에 있는 하라야마(原山) 유적을 조사하였더니 조몬 시대 만기(晩期)의 토기와 함께 한국식 지석묘 무리가 발견됐다. 또한 시마바라 반도의 구레이시바루(礫石原) 유적에서는 벼와 직물이 짓눌린 흔적이 있는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이미 조몬 시대 만기에 한국 문화와 접촉이 있었으며, 야요이 문화의 주요 구성 요소 중에 벼와 직물이 조몬 만기의 사회에 전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체계일본역사’·1967)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홍윤기 교수 (2009년 1월 13일). “[홍윤기의 역사기행]<84>고대 논터 발굴된 오사카 ‘나가하라 유적’”. 세계일보. 2009년 7월 8일에 확인함. 이 글의 결론 부분에서 니시타니 교수는 “일본에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여러 요소를 검토해보면 그 모든 것이 한반도 남부와 직결된다. ... ”고 했다.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홍윤기 교수 (2006년 7월 25일). “ [홍윤기의 역사기행] ①일본 속 백제 발자취’”. 세계일보. 2009년 7월 8일에 확인함. 일본에서는 백제를 ‘구다라’로 부르기 때문이다.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홍윤기 교수 (2006년 7월 25일). “ [홍윤기의 역사기행] ①일본 속 백제 발자취’”. 세계일보. 2009년 7월 8일에 확인함. 오사카(大阪)는 일본 제2의 대도시다. 일찍이 한반도 남쪽에서 배를 타고 거센 물결을 헤치며 열도로 건너간 백제인들은 이곳에 몰려 살면서 ‘백제주(百濟洲)’라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본어로는 ‘구다라스(百濟洲·くだらす)’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백제를 ‘구다라’로 부르기 때문이다.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홍윤기 교수 (2006년 8월 1일). “[홍윤기의 역사기행]②구다라스의 백제인 왕과 왕인 박사 ”. 세계일보. 2009년 7월 19일에 확인함. 약2000년 전에 일본으로 간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은 ‘벼농사법’도 전수했다. 한반도 벼농사의 도래에 관해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토대학 사학과 교수는 고고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모름지기 일본의 벼농사 문화는 한반도 남쪽인 한국을 거쳐 직접 전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한국 특유의 바둑판형 지석묘가 기타큐슈(北九州)의 조몬(繩文) 시대(BC 3세기 이전) 후기 말경부터 야요이 시대(BC 3∼AD 3세기) 전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한국의 지석묘에 있는 특유한 마제석기가 기타큐슈의 야요이 시대 전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 등은 야요이 문화 형성기에 한국과 기타큐슈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 또한 시마바라 반도의 구레이시바루(礫石原) 유적에서는 벼와 직물이 짓눌린 흔적이 있는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이미 조몬 시대 만기에 한국 문화와 접촉이 있었으며, 야요이 문화의 주요 구성 요소 중에 벼와 직물이 조몬 만기의 사회에 전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체계일본역사’·1967)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홍윤기 교수 (2009년 1월 13일). “[홍윤기의 역사기행]<84>고대 논터 발굴된 오사카 ‘나가하라 유적’”. 세계일보. 2009년 7월 8일에 확인함. 이 글의 결론 부분에서 니시타니 교수는 “일본에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여러 요소를 검토해보면 그 모든 것이 한반도 남부와 직결된다. ... ”고 했다.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web.archive.org

wikipedia.org

zh.wikipedia.org

  • 일연 (1281). 〈권2 기이 효성왕〉. 《삼국유사》. 開元十年壬戌十月。始築關門於毛火郡。今毛火村。屬慶州東南境。乃防日本塞垣也。周迴六千七百九十二步五尺。役徒三萬九千二百六十二人。掌員元真角干。開元二十一年癸酉。唐人欲征北犾。請兵新羅。客使六百四人來还國 (효성왕 개원(開元) 10년 임술(壬戌)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 (毛火郡)에 관문(關門)을 쌓았다. 지금의 모화촌 (毛火村)으로 경주 (慶州)의 동남지역에 속하니, 곧 일본 (日本)을 방어하는 요새였다. 둘레는 6천 7백 92보 5자 이고, 동원된 역부는 3만 9천 2백 62명이며, 감독관(掌員)은 원진 (元眞) 각간(角干) 이었다. ) 
  • 진수 (3세기). 〈三國志 卷30 烏丸鮮卑東夷傳〉. 《삼국지》. 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巿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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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九年 夏四月 倭兵大至 王聞之 恐不可敵 造草偶人數千 衣衣持兵 列立吐含山下 伏勇士一千於斧峴東原 倭人恃衆直進 伏發擊其不意 倭人大敗走 追擊殺之幾盡 (9년 여름 4월에 왜의 군사가 대거 이르렀다. 왕이 듣고서 대적할 수 없을까 두려워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서 토함산 아래에 나란히 세워 두었다. 그리고 용맹한 군사 1천 명을 부현(斧峴)의 동쪽 들판에 숨겨놓았다. 왜인이 자기 무리가 많음을 믿고 곧바로 나아가자 숨어 있던 군사가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군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다. ) 
  •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三十八年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今賊棄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步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38년 여름 5월에 왜인이 와서 금성(金城)을 에워싸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 깊숙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칼날을 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00명을 먼저 보내 돌아가는 길을 막고,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 
  • 김부식 (1145). 〈본기 권25 개로왕〉. 《삼국사기》. 二十一年...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 下馬拜已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戕之(21년(475년)... 왕이 [성을]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 
  • 김부식 (1145). 〈본기 권25 개로왕〉. 《삼국사기》. 二十一年... 文周乃與木劦滿致·祖彌桀取 木劦·祖彌皆複姓 隋書以木劦爲二姓 未知孰是 南行焉 (21년(475년)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劦)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개의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 卷第十七 繼體天皇〉. 《일본서기》. 720. 七年夏六月 ... 貢五經博士段楊爾。 
  • 卷第十七 繼體天皇〉. 《일본서기》. 720. 十年夏五月 ... 別貢五經博士漢高安茂、 
  • 卷第十九 欽明天皇〉. 《일본서기》. 720. 十三年...冬十月、百濟聖明王、更名聖王。遣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等、獻釋迦佛金銅像一軀・幡蓋若干・經論若干卷。 (13년(552년) 겨울 10월, 백제의 성명왕(혹은 성왕이라고도 한다)이, 서부달솔 희씨 노리사치계를 보내어 석가불금동상 1구와 깃발 약간, 경전 여러 권을 보냈다. 
  • 卷第二十 敏達天皇〉. 《일본서기》. 720. 六年...冬十一月庚午朔、百濟國王、付還使大別王等、獻經論若干卷、幷律師・禪師・比丘尼・呪禁師・造佛工・造寺工、六人。遂安置於難波大別王寺。 
  • 卷第二十 敏達天皇〉. 《일본서기》. 720. 十二年... 今在百濟火葦北國造阿利斯登子達率日羅、賢而有勇。... 冬十月、紀國造押勝等、還自百濟。復命於朝曰、百濟國主、奉惜日羅、不肯聽上。 
  • 卷第二十 敏達天皇〉. 《일본서기》. 720. 十三年... 秋九月、從百濟來鹿深臣、闕名字。有彌勒石像一軀。佐伯連、闕名字。有佛像一軀。 
  • 卷第廿一 用明天皇 崇峻天皇〉. 《일본서기》. 720. 崇峻天皇 ... 元年春三月、... 百濟國遣恩率首信・德率蓋文・那率福富味身等、進調幷獻佛舍利、僧聆照律師・令威・惠衆・惠宿・道嚴・令開等、寺工太良未太・文賈古子・鑪盤博士將德白昧淳、瓦博士麻奈文奴・陽貴文・㥄貴文・昔麻帝彌、畫工白加。 
  • 卷第廿二 推古天皇〉. 《일본서기》. 720. 十年... 冬十月、百濟僧觀勒來之。仍貢暦本及天文地理書、幷遁甲方術之書也。是時、選書生三四人、以俾學習於觀勒矣。 
  • 卷第廿五 孝德天皇〉. 《일본서기》. 720. 三年...冬十月...新羅遣上臣大阿飡金春秋等、送博士小德高向黑麻呂・小山中中臣連押熊、來獻孔雀一隻・鸚鵡一隻。仍以春秋爲質。春秋美姿顏善談笑。 
  • 卷第廿五 孝德天皇〉. 《일본서기》. 720. 二年春三月...是歲、新羅貢調使知萬沙飡等、着唐國服、泊于筑紫。朝庭惡恣移俗、訶嘖追還。于時、巨勢大臣、奏請之曰、方今不伐新羅、於後必當有悔。其伐之狀、不須舉力。 
  •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十三年 ...秋八月 王與倭國通好 (13년(653) ... 가을 8월에 왕은 왜(倭)와 우호를 통하였다. ) 
  • 卷第廿三 舒明天皇〉. 《일본서기》. 720. 三年...三月庚申朔、百濟王義慈入王子豐章爲質。 
  •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迎古王子扶餘豊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일찍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옛 왕자[古王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았다. ) 
  • 卷第廿七   天智天皇〉. 《일본서기》. 720. 四年…十二月…秋八月。…遣達率憶禮福留。達率四比福夫於筑紫國築大野及椽二城。 
  • 卷第廿七   天智天皇〉. 《일본서기》. 720. 六年…十一月…是月。築倭國高安城。讃吉國山田郡屋嶋城。對馬國金田城。 
  • 김부식 (1145). 〈본기 권8 성덕왕〉. 《삼국사기》. 二年...日本國使至 摠二百四人 (2년(703)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모두 204명이었다. ) 
  • 김부식 (1145). 〈본기 권8 성덕왕〉. 《삼국사기》. 二十一年 …冬十月 …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 (21년(722) …겨울 10월에 …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쌓아 일본 도적들이 [노략질하는] 길을 막았다.) 
  • 김부식 (1145). 〈본기 권8 성덕왕〉. 《삼국사기》. 三十年 …日本國兵船三百艘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秋九月 命百官會的門 觀射車弩 (30년(731)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으므로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가을 9월에 백관에게 명하여 적문(的門)에 모여 수레 쇠뇌(車弩) 쏘는 것을 관람하도록 하였다.) 
  • 김부식 (1145). 〈본기 권9 경덕왕〉. 《삼국사기》. 元年 冬十月 日本國使至 不納 (원년(742) 겨울 10월에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이르렀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다.) 
  • 김부식 (1145). 〈본기 권9 경덕왕〉. 《삼국사기》. 十二年 秋八月 日本國使至 慢而無禮 王不見之 乃廻 (12년(753) 가을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오만하고 예의가 없었으므로 왕이 그들을 접견하지 않자 마침내 돌아갔다.) 
  • 김부식 (1145). 〈본기 권10 애장왕〉. 《삼국사기》.  哀莊王… 四年 … 秋七月 與日本國 交聘結好 (애장왕…4년(803) 가을 7월에 일본국과 서로 사신을 교환하여 예방하고 우호를 맺었다.) 
  • 김부식 (1145). 〈본기 권10 애장왕〉. 《삼국사기》.  哀莊王… 五年 … 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黄金三百兩 (애장왕…5년(804) … 여름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 김부식 (1145). 〈본기 권11 헌강왕〉. 《삼국사기》.  憲康王… 八年 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 明珠一十箇 (헌강왕 8년(882) 여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량과 야광주[明珠] 10개를 바쳤다.) 
  • 卷第廿二 推古天皇〉. 《일본서기》. 720. 十年... 冬十月、百濟僧觀勒來之。仍貢暦本及天文地理書、幷遁甲方術之書也。是時、選書生三四人、以俾學習於觀勒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