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sis of information sources in references of the Wikipedia article "혜능" in Korean language version.
엄밀한 의미로 말하면 경(經)일 수 없고, 조사어록(祖師語錄)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해박한 사상성과 간결한 문체 때문에 우리 나라·중국·일본 등의 여러 나라에서 경과 같은 존숭을 받아 오고 있다.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법보단경(法寶壇經)≫이라고도 한다.
서기 732년 하남성 활대(滑臺) 대운사(大雲寺)에서 수만 명이 모인 가운데 무차대회를 개최하고는 북종을 향하여 “신수는 방계이다. 조계 혜능이야말로 달마선의 정통 조사다”라고 포문을 열었다. 동시에 그는 돈오사상을 전개했는데, 이것을 ‘활대(滑臺)의 종론(宗論)’이라고 한다. 스승 혜능을 6조로 세우기 위한 하택의 모험적인 도전이었는데, 역사적인 이 사건으로 인하여 혜능은 입적한지 30년 만에 공식적으로 선종의 제6조가 된다.
처음엔 신수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나, 후에 혜능의 문하로 들어가
혜능의 법을 이은 계통을 남종선이라 하고 신수의 계통을 이은 선을 북종선이라고 한다.
남종선과 북종선의 사상적 차이는 수증법(修證法, 닦아 깨닫는 방법), 즉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에 있다. 돈오란 수행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번에 최고의 경지까지 깨닫는다는 뜻이고, 점수는 점오(漸悟)와 같은 말로 하나하나 깨달아 올라감, 점진적·단계적으로 수행하여 깨닫는다는 뜻이다. 이것을 ‘남돈북점(南頓北漸, 남종은 돈오, 북종은 점수)’이라고 한다.
반면 대통신수의 북종선은 2∼3대를 지나 뛰어난 제자들이 배출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 가르침이 계승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중국 선을 총칭하는 5가7종(五家七宗)은 모두 남종선 계통이다.
혜능이 입적한 지 100여년이 지난 816년, 대감선사(大鑑禪師)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조계혜능 스님(曹溪慧能, 638~713)
하루는 하택신회(荷澤神會, 668∼760)스님이 와서 절하고 스님에게 도를 물으니, 스님이 말했다. “어디서 왔는가?” 신회스님이 대답했다. “조계에서 왔습니다.” “조계의 뜻하는 바가 어떠하던가?” 신회스님이 아무 대답도 못하고 몸을 흔들기만 하니, 스님이 말했다. “아직도 기왓쪽이 막혀서 쓸모가 없구나.” 신회스님이 다시 물었다. “화상(和尙)은 요사이 진금(眞金)을 사람들에게 주시지 않습니까?” 스님께서, “설사 그대에게 준다 한들 어디에 쓰겠는가?” 하며 신회스님을 눌렀다.
713년 국은사(國恩寺)에서 입적하기 직전, 혜능스님은 열 명의 제자를 불러놓고 이렇게 당부했다. “이후에 법을 전하되 서로가 〈단경〉 한 권을 가르쳐 주어 본래의 종취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라. 〈단경〉을 이어받지 않는다면 나의 종지가 아니다. 이제 얻었으니 유포하여 행하게 하라. 〈단경〉을 얻는다면 내가 친히 주는 것을 만남과 같다.” (이어 “열 명의 제자들이 가르침대로 〈단경〉을 베껴서 대대로 널리 퍼지게 하니, 얻은 이는 반드시 자성을 볼 것이다”라 기록되어 있다. 〈단경〉 대법)
혜능이 입적한 지 100여년이 지난 816년, 대감선사(大鑑禪師)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연이어 대감진공선사(大鑑眞空禪師), 대감진공보각선사(大鑑眞空普覺禪師), 대감진공보각원명선사(大鑑眞空普覺圓明禪師)라는 또 다른 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혜능대사라는 한 송이 꽃에서 선가(禪家)의 오종(五宗)이 온 천하를 뒤덮었다고 하여 일화오엽(一花五葉)이라는 말이 있게 되었다. 한국 선불교의 원류를 혜능스님이 법을 폈던 조계산(曹溪山)에서 찾고 전통불교의 종파 이름을 조계종이라고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남종선(南宗禪)의 시조인 혜능은
우리나라의 조계종(曹溪宗)이나 조계사 및 송광사가 있는 조계산도 여기에서 명칭이 유래되었다.
혜능의 문하 제자 중에는 청원행사·남악회양·하택신회·남양 혜충· 영가 현각이 유명하다.
이후 달마는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그의 법은 혜가·승찬·도신·홍인을 거쳐 혜능에게 이어졌다.
혜능의 문하인 남악 회양-마조 도일-백장 회해의 법손에서 위산영우와 앙산 혜적의 위앙종, 백장 회해-임제 의현의 임제종이 출현한다. 또한 청원 행사-석두 희천의 법손에서 동산 양개와 조산 본적의 조동종, 운문 문안의 운문종, 법안 문익의 법안종이 출현하였다. 북송대에 이르러 임제종의 석상 초원의 제자 방회가 양기파, 혜남이 황룡파로 갈라져 나와 7종(宗)을 이루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위협을 피해 남방으로 가서 숨어 지내기를 16년, 세월이 흘러 혜능의 나이 39세가 되자, 이제 홍법할 시기가 왔음을 알고 의발보따리를 지고 정처 없이 떠돌다 광주 땅 법성사에 들르게 되었다.
광주 땅 법성사에 들르게 되었다. 이 절에서는 마침 도가 높은 인종법사가 수백 명 행자를 거느리고 열반경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혜능은 맨 뒷자리에 앉아 법사의 강연에 귀를 기울였다. 때는 늦은 여름이라 조는 자도 있었고, 작은 소리로 잡담을 하는 자도 있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절의 깃발이 펄럭거리니
인종법사는 강연을 멈추고 그들의 논쟁이 어떻게 끝맺을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혜능이 빙그레 웃으니, 두 행자는 혜능에게 판단을 해달라고 했다. 이에 혜능은“그것은 깃발의 움직임도 아니요, 바람의 움직임도 아닙니다. 단지 두 스님의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인종법사는 혜능의 대답이 간략하고 이치가 뛰어난데 감동받고 그가 6조 혜능임을 알아 보았다. 크게 놀란 인종법사는 곧 예를 갖추고 절을 올렸고, 혜능의 머리를 깎아 주고 스스로 제자가 되어 그들 스승으로 모셨다.
이듬해부터 혜능은 남쪽 조계산에 보림사(현 남화사)를 짓고 36년간 전법을 펼쳤다. ‘조계’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마을에 조(曹)씨들이 많이 살고, 동구에 시내가 흐르고 있다 하여붙여진 이름인데 혜능이 오래 주석함으로써 조계는 혜능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쓰이게 되었고, 우리나라의 ‘조계종’이나 ‘조계사’라는 명칭도 여기에서 온 것이다. ~~~ 이곳에는 지금도 혜능의 시신을 그대로 모신 진신 육신상이 있다.
혜능이 조계의 보림사에서 선풍을 드날리자 소주자사 위거가 청하여 대범사 강당에서 설법을 하였는데, 이때 강연한 것을 문하생인 법해가 기록하여 편집되어 오늘날 전해지는 단경이 되었다.
그 이후 30여년간 설법을 통해 명성을 드날렸는데, 측천무후와 당나라 중종은 칙서를 내려 관직을 주려하였으나 혜능은 이를 거부하였고,
혜능이 조계의 보림사에서 선풍을 드날리자 소주자사 위거가 청하여 대범사 강당에서 설법을 하였는데, 이때 강연한 것을 문하생인 법해가 기록하여 편집되어 오늘날 전해지는 단경이 되었다.